●‘악의 연대기’(감독 백운학ㆍ제작 비에이엔터테인먼트ㆍ러닝타임 102분ㆍ개봉 5월14일)

[스포츠한국미디어 이정현기자]특급 승진을 앞둔 최반장은 회식 후 의문의 괴한에게 납치당한다. 위기를 모면하려던 그는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승진을 위해 사건을 은폐하기로 한다. 이튿날 아침, 자신이 죽인 시체가 경찰서 앞 공사장 크레인에 매달린 채 공개되고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힌다. 자신이 저지른 살인사건을 담당하게 된 최 반장은 점점 좁혀오는 수사망에 불안함을 느낀다.

▲ 내러티브 씹어 먹는 손현주의 힘

손현주는 무표정에 많은 것을 담을 줄 아는 배우다. 정지된 화면에서 그를 바라보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우나 희한하게 극 중에서는 읽힌다. 흔히 선과 악을 구분하기 힘든 얼굴을 최고의 배우의 얼굴상으로 꼽기 마련인데 손현주는 얼굴 표정 하나에 희로애락 전체를 담아버린다. ‘포커페이스’를 보는 듯한데 이를 바탕으로 드라마를 끌어가는 힘이 무지막지하다. ‘악의 연대기’의 경우 초반 한시간 분량 가량을 혼자 짊어지는데 버겁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자신이 저지른 살인 사건에 대한 수사를 방해하고, 증거를 인멸하며 혹여나 어두운 면이 탄로 날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모두 담겼다. 단순한 플롯임에도 시퀀스마다 기승전결이 살아있는 건 온전히 손현주 덕이며 ‘악의 연대기’에서 스펙터클을 느꼈다면 그것은 손현주의 얼굴에서 온 것이다.

▲ 흔들리는 최반장, 흔들린 드라마 트루기

손현주 혼자 짊어졌던 드라마는 절반을 넘어서며 한계를 맞는다. 사건의 내막이 조금씩 드러나고 드라마의 짐을 여럿이나 나눠 드는데 이때부터 중심을 잃는다. 마지막 꺼풀이 벗겨지기 시작할 땐 정도가 심해진다. 한국 스릴러영화의 고질적 문제인 반전에의 집착과 이로 인한 문제점이 ‘악의 연대기’에서 보인다. 잘 짜였던 전반부를 기억하기에 아쉬움이 크다. 우발적 살인사건을 덮으려는 형사의 이야기는 김성훈 감독의 2013년 작 ‘끝까지 간다’와 유사해 보이나 꼬인 실타래를 풀어가는 과정은 다르다. ‘끝까지 간다’가 특수 상황 속에 인물들을 던져놓고 카메라만 비췄다면 ‘악의 연대기’는 각본에서 정해진 방향으로 인물을 돌려세운다. 결과적으로 범죄 액션물로서 쭉 뻗은 직진의 쾌감을 느끼게 했던 전자와 달리 ‘악의 연대기’는 빙빙 돌다 자기가 꼰 실타래에 제 발이 걸렸다. 두 번 이상 비틀었기에 예상하기 쉬운 반전은 아니나 필요한 방식이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반전은 얼마만큼 관객을 잘 속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적절했느냐가 더 중요할 것인데 주객이 전도됐다.

▲ 명불허전 손현주, 생활연기 마동석 그리고 루키 박서준

그럼에도 손현주에 거는 기대는 크다. 드라마 ‘추적자’와 영화 ‘숨바꼭질’ 등 유사 장르에서 무패 행진을 벌이는 그는 안정적인 티켓 파워를 가진 몇 안 되는 배우다. 또 손현주와 스릴러 장르가 만났을 때의 시너지 효과는 항상 기대 이상이었던 터라 이른바 ‘손현주 버프’를 ‘악의 연대기’도 받을 수 있을지 기대된다. 그와 호흡한 마동석도 유심히 봐야 하는데 “너 오늘 술 좀 먹어야겠다” “운동 좀 했는데?” 등의 대사에서 생활감을 부여할 수 있는 배우는 흔치 않다. 최근 들어 캐릭터가 살가운 형사 혹은 범죄자로 좁아지는 경향이긴 하나 정체되어 있지 않고 조금씩 깊이 파고드는 중이다. 손현주의 무표정한 얼굴과 생동감 있는 마동석이 꽤 조화롭다. ‘악의 연대기’로 스크린 데뷔한 박서준은 다소 밋밋하나 이것이 그에게 부여된 역할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합격점을 줄 만하다. 특히 후반부부터 이어지는 활약은 앞으로 충무로에서의 활약을 기대해 봄직하다. 적어도 배우에 있어서 ‘악의 연대기’는 수확이 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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