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치', 불가능에 도전한 속도전… 방송사 안전불감증만 커져
'가족끼리 왜이래'는 방송 2주 앞서 대본 나오며 완성도 높여

또다시 방송사고가 났다. '이번에도' 예견된 사고였다.

마지막회의 완성된 대본이 방송 이틀 전에야 나왔고, 촬영은 방송 몇시간 전에야 끝이 났으며, 그로 인해 방송 시간 전 완성된 테이프를 넘기지 못하고 아홉개로 쪼갠 편집본을 하나씩 순서대로 틀다가 결국 화면정지 등 세 차례 방송사고가 나고 말았다.

지난 17일 종영한 SBS TV 월화극 '펀치'는 그렇게 마지막회에 집중된 시청자의 관심에 구정물을 튀겼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권력층의 비리를 까발린 '펀치'는 화제 속에 시청률 상승 곡선을 그리다 마지막 19회에서 자체 최고 기록인 14.8%로 막을 내렸다. 결말에 시청자의 궁금증이 고조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19회까지 오는 동안 이른바 '생방송 제작'을 하면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해오던 드라마는 결국 '완전 범죄'에 실패하고 옥에 티를 남기고 말았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방송사고가 났다는 것이 아니다. 18회까지 방송사고가 나지 않았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제작이 제대로 될 수 없는 상황이 처음부터 계속 이어졌음에도 18회까지 사고없이 진행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완성도도 높았다는 게 문제다. 한마디로 불가능에 도전한 속도전이 성공을 거둔 것이다.

◇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도 결국은 만들어내

대본이 늦게 나오면 동선이 적고 품이 덜 드는 스튜디오 촬영에 집중할 법도 한데 '펀치'는 야외 촬영이 많았고, 동선도 길었으며, CG도 많이 사용해 후반작업에도 시간을 많이 할애해야했다. 심지어 19회에서는 의학드라마라 착각할 정도로 심장이식수술 장면이 비중 있게 다뤄졌다.

'펀치'의 주인공 조재현은 "대본이 방송 2~3일 전에 나와도 안정적으로 제작이 이뤄진다는 게 문제다. 참 말도 안되는 상황이지만 국내 제작진은 늘 그래 왔기 때문에 결국은 해낸다"며 혀를 내둘렀다.

조재현은 "'펀치'에는 CG도 많이 나왔는데 마지막회 방송사고 말고는 완성도도 계속 높았다. 대본이 늦게 나왔다고 허술하게 만든 것도 아니다. 찍을 건 다 찍었다"고 덧붙였다.

'펀치'의 박경수 작가는 이 드라마의 종방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본을 늦게 넘긴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스토리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참석하지 않았다.

앞서 김래원은 "대본이 너무 늦게 나오는 게 문제다. 대본이 너무 좋은데, 그래서 보고 있으면 화가 난다. 이 대본을, 이 좋은 대사들을 더 잘 해내고 싶은데 그럴 시간이 없어서 화가 난다"고 토로했고, 최명길과 박혁권 등 모든 출연진이 대본이 늦게 나오는 것을 언급하며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촬영이 진행됐지만 대본이 좋고 드라마의 완성도가 높게 나와 호평을 받으니 '펀치'의 종방연에서 작가를 비난하는 말은 쏙 들어갔다. 박 작가는 전작인 '추적자'와 '황금의 제국' 역시도 대본을 살인적으로 늦게 내놔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그 두 작품 역시 대본의 질이 높고 결과도 좋다보니 박 작가의 주가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 늘 방송사고 위험 안고 가… 안전불감증만 커져

반면, KBS 2TV '가족끼리 왜이래' 같은 작품도 있다. '펀치'보다 이틀 앞선 지난 15일 막을 내린 '가족끼리 왜이래'는 방송보다 2주 앞서 대본이 나오면서 여유로운 환경 속에서 제작이 이뤄졌다.

미니시리즈와 연속극이 지니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 '펀치'와의 절대 비교는 어렵지만, 연속극이라고 다 일찍 대본이 나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가족끼리 왜이래'의 사례는 방송가에서도 모범 사례로 꼽힌다.

유동근 등 '가족끼리 왜이래'의 배우들은 이구동성으로 강은경 작가의 질 좋은 대본이 일찍 나온 덕에 작품의 완성도가 더 높아질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 드라마는 시청률 40%를 넘기며 '국민드라마'로 자리매김했다.

유동근은 "그전까지는 대본이 나오면 내 분량만 보기 바빴는데, 이번에는 대본이 일찍 나오니까 동료들의 연기가 보이더라. 중요한 장면에서는 서로가 머리를 맞대 의논하면서 연기를 하니 완성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물론, 대본이 빨리 나온다고 다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니고, 시청률이 안 좋으면 대본이 빨리 나와도 계속 수정하기 때문에 제작이 지연되기 십상이다. 시청자의 반응에 따라 대본을 수정하고,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통해 한류드라마의 경쟁력이 높아졌다고 해석하는 시각도 많다. 하지만 대본이 여유 있게 나오면 아무래도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작가별 편차 탓도 크지만, 방송사의 편성이 늦게 이뤄지는 것이 생방송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가장 주요한 원인으로 지적된다.

'가족끼리 왜이래'처럼 연속극은 방송사 편성이 일찌감치 이뤄지기 때문에 대부분 대본이 많이 나온 상태에서 제작에 들어가는 이점이 있다. 현재 방송 중인 MBC '전설의 마녀'도 방송보다 2주 앞서 제작이 진행되고 있고, 지난해 최고 화제작인 MBC '왔다! 장보리'도 한주 정도 앞서 나갔다. 두 작품 모두 시청률 30%를 넘어섰다.

반면, 미니시리즈는 편성이 늦게 이뤄지기 때문에 처음부터 제작이 촉박한 경우가 다반사다. 대개 방송을 앞두고 대본이 4회 정도 나와 있는데, 이렇게 시작한 대부분의 드라마가 생방송 수준으로 촬영을 진행한다. '펀치'의 경우는 그보다도 적은 2회까지밖에 대본이 안 나온 상태에서 방송 날짜가 잡혀 시간이 더 부족했다.

이는 방송사들이 좀더 경쟁력이 높은 작품을 편성하려고 저울질하다가 빚어지는 악순환이다. 또한 많은 작품이 방송사고의 위험을 안고 제작을 진행하지만 정작 그다지 큰 사고는 나지 않은 것이 이런 악순환을 이어가게 하고 있다.

앞서 '싸인' '시크릿 가든' 등의 드라마도 컬러바가 뜨거나, 음향 사고 등이 났지만 전반적으로 완성도가 높았고 인기도 많았기 때문에 이들의 방송사고에 대한 문제의식은 그때뿐이었다.

방송 관계자들이 한류의 한단계 도약을 위해서라도 드라마 생방송 제작시스템은 반드시 개선해야한다고 입을 모은 지는 이미 오래다. 하지만 여전히 악순환은 계속되고 있다.

방송사의 '안전 불감증'만 커지고 있다. '펀치'가 사랑받았다고 또 그냥 넘어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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