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인 '싹싹', 김수현 '영리'

"작가는 글 뒤에 숨을 수 있어요. 감독은 그림 뒤에 숨을 수 있죠. 하지만 배우는 달라요. 얼굴 표정 말투 목소리. 배우는 모든 게 드러나는 사람입니다. 숨을 곳이 없어요."

MBC 수목미니시리즈 '해를 품은 달'(극본 진수완)의 김도훈 PD는 배우에 대한 책임감을 중요시 여겼다. 김도훈 PD는 '해를 품은 달'을 촬영하면서 '배우들의 피신처를 만들어 줘야 한다'는 신념을 세웠다. 배우들의 연기가 칭찬받고, 등장인물의 감정이 시청자들의 마음에 와 닿는 길은 자신이 닦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김도훈 PD는 아역배우에게 6회 분량을 맡기는 게 부담됐다. 아역배우에서 성인배우로 넘어가는 7회는 긴장감이 최고조로 치달았다. 한가인 연기력 논란이 불거졌을 때는 미안한 마음이 컸다. 3일 오후 경기도 이천 호법 실내세트장에서 만난 김도훈 PD는 "배우들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이라 정말 행복하다"며 웃었다. 내친김에 김도훈 PD에게 '이 배우는 이랬다'를 부탁했다.

▲ 털털한 한가인… 영리한 감수성 김수현

김도훈 PD에게 한가인은 "현장에서 가장 털털한 배우"였다. 연기력을 둘러싼 비난도 직감했다고. 6회 방송을 앞두고 김도훈 PD는 "연기력 논란, 사람들이 벼르고 있을 테니 신경 쓰지 말아라"고 했고 한가인은 "죄송하다. 앞으로 열심히 달라지는 모습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한가인은 생각 외로 굉장히 싹싹하고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대화도 잘 통했고요.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대로 제 말을 잘 따라와줬고요. 무녀 월이 된 연우가 옛 기억을 찾고 오열하는 신은 스태프 박수가 쏟아졌죠. 컷을 외친 후에도 한가인이 10분을 더 울더군요."

얼굴에 웃음 꽃이 핀 김도훈 PD에게 "김수현은 어땠냐"고 질문하자 웃음 꽃이 만개한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김수현은 도대체 어디서 온 배우인지 모르겠다"며 말을 이었다.

"감성과 이성이 정확히 50대 50인 배우인 것 같아요. 그 나이 또래에 이렇게 연기하는 배우가 있나 싶습니다. 보통 배우들이 감정에 빠져 연기를 하면 기술적인 면을 생각 못하거든요. 반대로 계산을 해서 연기를 하면 감정이 안 살아요. 김수현이 연기를 할 때 이런 적이 있었어요. 한창 감정에 몰입해 있는데 '아, 촬영 전에 고개를 이쪽으로 돌려달라고 말해줄걸'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순간 고개를 원하는 방향으로 돌려줬어요. 늘 그런 식이에요. 감탄했죠."

▲ 변두리에서 중심으로, 정은표

"훤과 환상의 콤비를 보여준 형선에 대한 감탄도 대단했다"는 말에 "아, 초반에는 오버해서 힘들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배우 정은표는 극중 훤의 상선내관 형선 역으로 사랑을 받았다. 훤의 선생님 아버지 남동생 등 다양한 캐릭터로 자리잡으며 '귀여운 형선'이란 별칭까지 얻었다.

"처음에는 형선 역할에 대해서 정은표와 상의를 하는데 영, 모르겠더라고요. 서로 이 캐릭터에 대한 정의가 안 내려지는 거에요. 귀엽지만 불쌍하게 가자고 컨셉트를 잡았는데 초반에는 감정이 좀 과하게 잡혔어요. '선생님, 주인공을 가릴 만큼 연기를 하면 어떻게요'라고 구박도 했죠.(웃음) 이제는 벽보고 돌아설 때 올망졸망 움직이는 발걸음부터 모든 디테일을 정은표가 스스로 만든 거에요. 변두리에서 중심에 설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신거죠."

▲ 송재희-남보라, 발전폭 가장 커

이날 스태프의 박수 속에 감정신 촬영을 마친 송재희와 남보라. 김도훈 PD는 두 사람에게 "가장 발전된 배우"라고 평가했다. 촬영 초반에는 극중 알콩달콩한 부부애를 보여줘야 했지만 실제 나이차이 때문에 어색함을 지울 수 없었다고.

"남보라는 송재희를 살짝 어려웠했었죠.(웃음) 그 부분을 없애주기 위해서 대화를 많이 나눴어요. 무엇보다 남보라와 송재희가 연기하는데 부담이 없도록 둘 사이에 대화를 자주 유도했고요."

"송재희와 임시완의 '간극 논란'도 극복하기 어려웠겠다"는 말에 고개를 떨구며 웃었다. 김도훈 PD는 "그런 걱정은 전혀 없었는데 시청자의 시선이 날카로웠다"며 "송재희가 그 논란에 신경 쓰느라 연기에 몰입을 못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어 "나이에 대한 부담을 덜어내는 작업이 정말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 남자의 향기가 밴 여진구… 영화 'ET'로 통한 김유정

임시완의 이야기가 나온 김에 아역배우에 대한 평가도 부탁했다. 김도훈 PD는 "날 울리게 한 '어리신 분들'"이라고 답했다. 극중 어린 훤(여진구)이 어린 연우(김유정)를 떠나 보내던 4회 엔딩부터 5회까지, 김도훈 PD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제가 미혼이에요. 아이도 당연히 없고요.(웃음) 평소에 아이들 눈 높이에서 무언가를 생각해 본적도 없기 때문에 아역배우들과 어떻게 대화를 이어나가야 하나 고민이 깊었습니다. 여진구 군은 15세라는 나이에도 남자의 향기가 느껴지는 어른스러움 때문에 더 어려웠어요.(웃음)"

김도훈 PD는 방송 초반 아역배우와 100번 이상 대화를 나눈다는 말이 흘러나오면서 '자상한 PD'라는 이미지가 형성됐다. 김도훈 PD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니 "실상은 외국인과 한국인의 대화처럼 쩔쩔매는 수준이었다"며 웃었다.

"여진구 김유정 이원근 임시완. 모두 연기력에 대해서는 검증을 하고 캐스팅한 친구들이었어요. 연기를 잘 해줄 거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걱정은 안 됐죠. 문제는 그 과정이었어요. 김유정 양이 한 번은 '감독님 연우가 귀신을 본 건데 왜 놀라질 않나요?'라고 묻더라고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난감했습니다."

30여 년의 세월을 이어준 건 영화 '이티(E.T)'였다. 김도훈 PD는 아역배우들과 드라마에 대한 대화를 나눌 때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를 떠올렸다.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를 보면 대부분 아이들이 주인공이고 아이들이 주요 관객이죠. '이티'도 그렇잖아요. 외계인과 아이들은 친구가 되지만 어른은 외계인을 경찰서에 신고하겠죠? 그런 생각으로 접근했더니 아이들과 대화가 좀 되더라고요.(웃음)"

저작권자 © 스포츠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