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연극배우 손숙

마른 몸, 예민해 보이는 얼굴, 수십 년 동안 연극계의 프리마돈나로 활약했던 이력까지. 깐깐하고 차가운 이미지 때문에 언뜻 보면 말 붙이기도 어려워 보이지만 그녀는 눈웃음 많고, 눈물도 많은 여린 사람이다.

배우라는 직함 외에 공식직함이 수십 개에 이르는 것도 간절하게 부탁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많은 여자, 무대에서 빛나는 그녀의 이름은 바로 연극배우 손숙이다.

밀양의 손씨 집성촌에서 엄격한 양반 교육을 받고 자란 그녀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배우가 된 것도,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한 것도, 힘들고 괴로웠던 날들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사랑 때문이었다고 한다.

신비감을 위해 여배우의 나이는 묻지 말라고 하지만, 예순 무렵에 나이에도 연두색 비키니가 잘 어울리는 그녀를 보면서 그녀의 나이를 먼저 잊는 건 관객들이다. 소녀의 설렘과 여자의 열정, 어머니의 깊은 혜안을 갖춘 사람. 사랑의 향기를 풍기는 손숙의 삶과 연극 이야기를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들어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연극배우 손숙

- 밀양의 안동 손씨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셨는데요. 어렸을 때 이야기 좀 해주세요.

경상도나 전라도 쪽 가면 기와집 많은 양반촌이 있잖아요. 저희 동네도 그런 집이었어요. 저희는 8촌까지 한 동네에 모여 살았어요. 아랫동네는 하인들이 살았고요. 아주 고루한 양반집이었어요. 예를 들어 동네 아저씨들과 잠깐만 놀아도 소문이 날 정도였고, 일제강점기 땐 양반촌에 어떻게 기차역이 서냐면서 기차역도 못 서게 했어요.

- 아버님이 천석꾼의 아들이었다고요?

네. 2대독자였어요. 천석을 했다고 전설로 얘기는 들었는데, 제가 자랄 때는 천석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 아버님은 평생 거의 일본에서 지내셨고, 어머님은 네 분이시라고요?

절 낳아주신 어머니가 첫째 부인이었고, 아버지가 일본에서 공부하다 만난 분이 둘째 부인이 계세요. 그리고 중간에 기생으로 만난 분이 계셨고요. 또 다른 일본 부인은 지금 아버지와 함께 살고 계세요.

친어머니는 16살에 결혼해서 아버지 얼굴은 거의 못 보시고, 저희 형제들 키우면서 평생을 사셨어요. 어머니는 교육에 대한 한이 많으셨어요. 더구나 아버지가 일본에서 신여성과 만나서 사셨으니까요. 그래서 딸 아들 구별 안 하고, 딸도 배워야 한다고 하셨어요. 근데 사회에 나가서 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남자 만나서 잘 살기 위해 배워야 한다는 게 어머니 신념이었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굉장히 고지식한 분이었어요. 어머니가 저희 3남매를 데리고 서울에 올라와서 키우실 때 어머니 친구 분들이 댄스를 권하셨는데요. 끝까지 못 하시더라고요. 그런 분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맨날 농담으로 "어머니는 아버지와 딱 세 번 잤을 거"라고 했어요. 아이를 셋 낳으니까요.(웃음)

- 어머니의 그런 모습이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제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늘 어머니와 애증의 관계였어요. 특히 전 예민했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미움이 굉장히 심했어요. 가끔 그런 걸 저희에게 푸는 게 너무 싫었고, 왜 저러고 사나 싶었죠. 돌아가실 때까지도 그런 게 있었어요. 안 뵈면 너무 가슴 아픈데, 막상 만나면 화가 나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그런 게 너무 한이 됐어요. 지금 제 아이들 셋이 다 결혼해서 호주에 가있는데요. 얘들이 전화를 자주 안 하면 되게 섭섭해요. 그러다가도 '그래. 내가 우리 엄마한테 어떻게 했는데. 당해도 싸지' 이런 생각 하면서 위로해요.

- 평소엔 낯가림도 심하고, 나서는 성격도 아니시라고요?

네. 어릴 땐 진짜 낯가림이 심했어요. 초등학교 땐 나와서 노래하라고 하면 울기부터 했어요. 근데 혼자 있을 땐 온갖 여우짓을 다 했어요. 하루 종일 혼자 거울 보면서 너무 잘 놀았어요.

- 학창시절엔 어떤 학생이었나요?

재수 없었어요. 공주과였죠.(웃음) 누가 있을 땐 눈 내리깔고, 입 다물고 아무런 얘기도 안 하고. 제가 생각해도 되게 재수 없는 아이였을 것 같아요. 공부는 잘 했고. 선생님들이 예뻐해 주셨어요. 그래도 왕따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저는 친한 친구들에겐 굉장히 잘 하거든요. 사랑을 원만하게 받지 못해서 그런지, 마음을 여는 게 어려워요. 대신 한 번 정주고 말이 트이면 무척 수다스럽고, 있는 거 없는 거 다 줘요. 그게 결혼할 때까지 영향을 줘서 다 퍼주고, 당하고, 후회하기도 했죠.

- 자타공인 모범생이 어떻게 연극 경연대회에 출전하게 됐나요?

전 문학소녀였어요. 소설 읽고, 글 쓰는 걸 굉장히 좋아했어요. 근데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우연히 봤는데, 너무 큰 충격을 받았어요. 책에선 느끼지 못했던 직접적인 감동이 너무 커서, 그때부터 연극에 빠져들었어요. 그즈음 전국 고교연극 경연대회가 있었어요. 작품이 '춘향전'이었는데, 저는 너무너무 춘향이를 하고 싶었어요. 근데 제 성격상 오디션에 나서질 못한 거예요. 잘난 척, 나는 그런 거 안 하는 척 하느라. 그래서 저보다 한 학년 후배인 박인희 씨가 춘향이로 뽑혔고, 김을동 씨가 방자 역을 했어요. 그래서 제가 참다 참다 못해서 스태프로 참여하게 된 거예요. 저는 같잖은 자존심 때문에 평생 굉장히 힘들었어요.

- 그때 연극을 지도하러 오신 분이 훗날 남편이 되신 김성옥 씨인데요.

전 계속 문학을 하겠다고 생각했는데요. 학교 선생님께서 "역사와 철학을 알아야 문학을 한다"면서 국문과보다 사학과를 권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사학과를 갔어요. 근데 제가 입학한 해에 저희 학교에서 개교 60주년 기념으로 선후배 합동공연이 있었어요. 그래서 졸업한 선배들이 재학생과 함께 공연하려고 다 왔어요. 그때 고교시절 저희를 가르치던 그분을 같은 과 선배로 다시 만나게 된 거예요. 제가 여자 주인공을, 제 남편 됐던 분이 남자 주인공을 맡게 됐어요. 전 사랑에 빠지면 아무것도 안 보여요. 그래서 대학 3학년 때 결혼하면서 학교도 중퇴하고, 연극도 그만뒀어요.

- 어머니 입장에선 피눈물을 흘리며 말리셨을 것 같은데요.

피눈물 정도가 아니라 제 앞에서 죽겠다고 치마끈으로 목을 매셨어요. 내가 어떻게 너희들을 키웠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거였죠. 조건만 봐도 하나도 맞는 게 없었잖아요. 나이는 9살 차이나 나고, 재산은 없고, 딴따라에, 고향도 전혀 틀리니까. 아마 지금 제 딸이 그랬어도 어머니와 똑같은 심정이었을 것 같아요.

- 이후 다시 무대로 오게 된 계기는?

결혼해서 2,3년 살다보니 다른 건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무대에 대한 향수가 저를 아프게 했어요. 정말 아파서 드러누웠어요. 명동에 있는 시공간 극장 근처에서 연극 간판만 봐도 가슴이 뛰고. 게다가 그때는 여배우가 귀하던 시절이라 대학연극에서 이름을 날리던 사람들에겐 프러포즈가 많았어요. 그래서 남편한테 1년에 연극 2편만 하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어렵게 허락을 받아서 시작한 게 유진 오닐의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였어요.

- 결혼 후 무대에선 승승장구하셨죠?

그렇죠. 무대에선 운이 좋았어요.

- 하지만 그 와중에 남편은 사업에 실패하고, 손숙 씨에게 연극은 자아실현이 아니라 생존의 수단이 돼버렸는데요. 그때 자신을 지탱해준 건 무엇이었나요?

연극과 사랑이었어요. 전 사랑 없이는 못 살아요. 주는 사랑도 필요하고, 받는 사랑도 필요한데, 받는 사랑엔 늘 목이 마르네요. 전 아버지와 떨어져 살았어도 조부모님 사랑은 듬뿍 받고 자랐어요. 어머니의 사랑은 너무 커서 부담스러웠고요. 하지만 항상 뭔가 모자랐어요.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아요. 하지만 나는 기대고 싶어서 시작한 사랑인데, 어느 날 보면 그 사람이 저에게 기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늘 힘들었어요.

- 얼마 전까지도 남편의 빚을 갚기에 급급하셨다고요?

유난히 자존심 센 여자가 그런 일을 당하니까 정말 죽고 싶더라고요.

- 배우로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잠깐 장관을 할 때 러시아를 가서 우리나라 말로 이윤택 씨의 '어머니' 공연을 했는데요. 모든 러시아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해줬어요. 제 인생의 그런 찬란한 박수는 처음 받아봤어요. 내가 배우가 아니면 이런 환영은 못 받을 거라는 자부심이 생겼어요.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꽃을 한 송이씩 들고 줄을 쫙 서서 분장실로 들어왔어요. 그래서 제가 "왜 울었냐? 내용은 이해하고 울었냐?"고 물었더니, 그들이 "어머니라는 단어는 세계 공통어다. 우리도 전쟁을 겪고,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한다"더라고요. 지금도 힘들 땐 그때 생각을 해요.

나중에 그것 때문에 장관을 그만두게 됐을 때도 저는 진심으로 '배우와 장관은 절대 안 바꾼다'고 생각했어요. 배우 손숙으로서 장관 일을 잘 해보고 싶은 욕심은 있었지만, 배우 그만두고 장관 하라면 안 한다는 배우로서의 자긍심이 있었어요.

-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나요?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연극을 굉장히 좋아하세요. 제 연극에도 참 많이 오셨어요. 작품에 대해 굉장히 해박하시고, 때때로 금일봉도 주시고.

- 금일봉은 얼마예요?(웃음)

배우들 한 끼 밥 먹을 정도죠. 그런데 그분들이 어려운 시절에 저는 그분들 곁에 못 갔어요. 겁이 많아서 마음으로만 울분을 느꼈지, 행동으로는 못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불러서 밥도 사주시고, 따뜻하게 대해주셨어요.

- 김대중 전 대통령을 최초로 노래방에 출입하게 하신 분이 손숙 씨라고요?

대통령 선거에 떨어지시고 한참 어려울 때였어요. 노래방 가본 적이 있으시냐고 물었더니 한 번도 없으시대요. 그래서 그날 저녁에 신촌에 있는 굉장히 후진 노래방에 가서 한 시간 반 정도 노래를 불렀어요.

- 이휘호 여사님은 어떤 분인가요?

진짜 훌륭한 분이에요. 늘 한결같으세요. 그리고 남편에게 너무나 헌신적이에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감옥에 계실 때 양말까지 다리미로 다려서 넣어주셨대요. 안 그래도 그 안에서 어렵게 계시는데, 이런 거라도 깔끔하게 해드려야 한다고요. 그 얘기를 듣고 가슴이 뭉클했어요.

- 얼마 전 '어머니'라는 작품으로 고향인 밀양에 가셨는데요. 감회가 남다르셨겠어요.

어머니는 제가 배우 하는 걸 굉장히 못마땅해 하셨어요. 잘 되라고 서울까지 데려왔는데 내 딸이 딴따라라니. 그래서 제 연극은 한 번도 안 오셨어요. 그러다가 아주 연세 드셔서 아버지와 함께 제 공연을 보셨어요. 저는 잠깐 나오는 공연이었는데, 보시더니 "내 딸이 제일 예쁘더라"고 말씀시더라고요. 어머니 눈에는 당신 딸만 보였겠죠.

그러고서 돌아가신 뒤에 고향에 묻히셨는데요. 제가 고향에서 그 연극을 할 때 객석 중간에 어머니가 앉아계신 거예요. 전 생생하게 봤어요. 그 날 어떻게 공연했는지 모르겠어요. 공연이 끝나고 연출자 이윤택 씨가 와서 "여태껏 공연 중에 최고였다"고 흥분했던 기억이 나요.

- 그 공연을 계기로 이윤택 감독님은 밀양에서 터를 잡으셨죠?

네. 서울시에서 폐교를 내줘서 거기에 연극촌을 만들었어요. 지금도 연희단 거리패가 상주하면서 작품을 만들고 있어요.

- "하면 할수록 연극이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너무 힘들어서 2,3년 전부터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제가 연극 그만둔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어요. 내년 1월에 정동극장에서 박정자 씨와 함께 '신의 아그네스'를 공연하는데요. 연습장만 가면 제 눈이 반짝인데요.

- 두 분의 카리스마가 무척 기대되네요.

카리스마 하면 박정자 선배님이죠. 근데 사실 전 공지영 씨한테 한 가지 불만이 있어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수녀원장 역을 시켜준다더니 왜 안 시켜줬어요?(웃음) 그 역은 정말 해보고 싶었어요.

- 연극 외에도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하시는데요.

살아오면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는데요. 어떤 식으로든 조금은 갚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고,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80년대 초쯤이었는데요. 너무 빚에 몰리고, 남편도 없어져서 정말 죽으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그때 아이들이 끈이 되더라고요. 딸만 셋인데, 내가 죽으면 쟤들은 어떻게 되나. 그래서 베란다에서 뛰어내리려다가 참았던 적이 있어요.

그렇게 어려운 순간마다 연극에 저에겐 힘이 되요. 연습장에 가있으면 아무 생각도 안 나요. 언젠가 한번은 세무서에서 차압을 한다고 매일 빨간 딱지가 날아와서, 아침에 대구에 있는 세무서에 가서 손이 발이 되게 빌고, 허겁지겁 서울로 돌아와서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했어요. 그때 정말 무대가 아니었으면 죽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래도 다 견뎌져요. 지금도 굉장히 힘든 분들이 많을 거예요. 그걸 넘겨야 해요. 지면 안 되요. '죽는 마음이면 살지'라는 말이 당한 사람 입장에선 아니란 걸 알지만, 그래도 살아야 해요.

- 유머러스한 사람을 좋아하신다고요?

네. 전 다시 태어나면 개그맨과 결혼하고 싶어요.(웃음)

-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놀라운 비결 중 하나가 건망증이라고요?

심각해요. 치매인가 생각될 정도로.(웃음)

- 자녀들이 다 외국에서 살고 있는데, 쓸쓸하지 않으세요?

전 어릴 때부터 혼자 잘 놀아서 지금도 혼자 있는 시간이 외롭거나 쓸쓸하진 않아요.

- 사회적 공식직함을 다 제거한다면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아무것도 하기 싫어요. 실컷 자고, 공기 좋은 데 걸어 다니고, 벤치에 앉아서 햇빛도 보고, 꽃도 보고, 책도 읽으면서 살고 싶어요. 가끔 좋은 친구 만나서 맛있는 거 먹고, 수다 떨고. 어느 날 자다가 가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요.

- 꼭 한 번 더 하고 싶은 공연이 있다면?

'가을 엘레지'라고 노부부 얘기를 다룬 작품이 있는데요. 잔잔하고 너무 예뻐요. 저는 어떤 역할을 하고 싶다기보다는 제 나이에 맞는 잔잔한 감동을 주는 작품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그런 작품엔 관객이 안 와요. 시끌벅적하고 계속 웃겨야지, 생각하는 작품엔 관객들이 별로 안 오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 앞으로의 계획은?

내년 1월에 '신의 아그네스' 공연을 하고요. 작년부터 단국대 연극영화과에서 강의하고 있어요. 그리고 아름다운가게 일을 열심히 하고 싶어요.

▶ 진행 : 공지영
▶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월~토 오후 4시 5분~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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