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경영(52)이 개인적인 사건 이후 10년 만에 돌아왔다.

'부러진 화살'로 노익장을 과시한 정지영 감독의 신작 '남영동 1985'(이하 '남영동')에서 고문 기술자 이두한 역을 맡아 김종태(박원상)을 다종 다기한 방법으로 고문하며 관객의 숨통까지 서서히 옥죄며 소름끼치는 악역 연기를 선보였다.

최근 '모비딕', '후궁: 제왕의 첩'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지만 공개 석상에서는 일체 참석하지 않았던 이경영은 '남영동'을 시작으로 토크 프로그램에 출연해 불미스러웠던 사건에 연루됐지만 개인적으로 사건 당사자에게 사과를 받은 사연부터 아들과의 아픈 일화까지 개인사를 공개하며 대중과의 소통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경영은 최근 서울 삼청동에서 가진 한국아이닷컴과의 인터뷰에서 "정지영 감독님에게 '이제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응시해라. 이 작품이 충무로에 원대 복귀하는 작품이 됐으면 좋겠다'는 메일을 받았다. 정 감독님의 고언뿐만 아니라 그동안 나에게 출연 기회를 준 젊은 감독님들과 촬영 현장이 내 마음을 움직인 것 같다"며 "영화라는 숲이 내 자리를 만들어놓고 따뜻하게 기다려 줬다. 이제 숲에 돌아왔으니 잘 자라는 일만 남았다"고 말했다.

- '남영동 1985' 출연 소회를 말한다면.

▲ 특별한 액팅 플랜이 없었다. 시나리오에 그만큼 잘 나와 있었다. 감독님이 '부러진 화살'이후 '남영동'을 굉장히 서두르셨는데 그 이유가 자신에게 강렬하게 있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 목표 의식이 흐려지니까 그걸 놓치지 않으시려고 한 것 같다. 우리가 '감독님, 왜 이렇게 서두르세요' 했더니 '아냐, 지금 꼭 해야 해'라고 하셨다. 감독님에게도 뭔가 내리신 건지 아무튼 작업 자체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고문 피해자인 박원상이나 가해자 연기를 해야 하는 우리들 모두 힘들었지만 이 두 입장을 모두 지켜봐야 했던 정지영 감독님의 고통이 가장 컸을 거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너무 피곤하고 힘들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 고문을 의술처럼 펼치는 이두한 역 역시 쉽지 않았을 것 같다.

▲ 촬영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면 샤워도 하기 싫을 정도로 힘들었다. 흑채를 칠했기에 씻지 않을 수는 없었는데 온 몸에 탈수 현상이 와서 힘들더라. 나뿐만 아니라 가해자 역의 배우 모두가 그랬다. 카메라 앞에서 고도의 집중이 없으면 다 가짜로 보일수도 있으니까 모든 걸 집중하고 소진하고 오잖나. 다들 힘든 것을 견디기 위해 카메라 뒤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수다를 떨고 그랬다.

- 이근안을 모티브로 한 색다른 악역인데. '악마를 보았다'의 최민식 연기와도 비교되더라.

▲ 그 때 최민식을 보고 '아, 새끼. 저렇게 연기하면 나머지 사람은 악마 연기를 어떻게 하라고 저렇게 해'라고 했었다. '남영동'의 이두한은 자기 일의 정당성을 확보한 사람이다. 사람 자체가 괴물이라기보다 잘못된 애국심이 높은 사람이라고 봤다. 자신의 행위가 애국하는 길이라 믿었던 결과적으로 시대 권력이 만들어낸 또 다른 희생자가 아닐까.

- 복지부 장관이 된 김종태가 이두한을 찾아와 결국 용서를 못하고 돌아서는 장면에서의 연기도 인상적이던데.

▲ 그 장면을 찍을 때 감독님께 진심으로 용서를 빌어야 하는지 여쭤봤다. 그 순간만은 이두한도 진심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좀 헛갈렸다. 감독님 또한 이 영화를 용서와 화해의 시선을 포함해서 그리셨기에 그런 태도를 취했다.

- 특히 이두한이 고문 후 불어대는 '클레멘타인' 휘파람이 소름끼치게 다가오더라.

▲ 주위 지인들이 당분간은 '클레멘타인'을 좋아하기 힘들 것 같다고 하더라. 현장에서 배우나 스태프들이 집단 최면 상태 비슷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영화가 나오지 못했을 거다. 스태프 꼬맹이들까지 현장서 장비를 정리하다가 '클레멘타인'을 휘파람으로 불면 모두 나서서 말리곤 했다.

- 좌파 선전 영화라는 비판적 시각이 있다.

▲ 배우는 자기가 선택한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 사회성을 띄는 영화에 대해 이분법적 판단을 내리는 분들이 있다면 그 분들의 성향 때문이다. 제가 그 성향이 두려워서 배우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원칙이 흔들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 박원상이 김종태 역과 이두한 역을 바꿔달라고 청한 적이 있다던데.

▲ 원상이가 외형적으로 자신과 김근태 의장이 닮지 않았다는 것과 민주화 운동 대부 역할이라는데 부담을 가지더라. 하지만 나는 술을 좋아하기에 다이어트할 자신도 없었고 무엇보다 눈이 많이 탁해졌다. 원상이가 훨씬 더 맑은 눈을 가지고 있지 않나. 원상이에게 '네가 (연기로)해 본 가장 높은 직급이 뭐니. 이번에 장관까지 가 보자'며 설득했다. 원상이에게도 큰 도전이었지만 나에게도 큰 도전이었다. 감독님이 이근안에 대한 자료를 주시겠다는 걸 사양하고 모든 걸 시나리오에 의지했다. 이근안에 대해 알면 알수록 내 액팅에 제한이 되고 방해가 될 것 같았다. 아주 심플하게 역할에 다가갔다.

- 촬영 중 배역에 가장 몰입한 순간은.

▲ 김종태가 모든 자백을 했다가 상관(문성근) 앞에서 부인하는 장면이다. 이 때 이두한의 캐릭터가 극적으로 변한다. 김종태의 옷을 모두 벗기고 개처럼 취급하지 않나. 이 장면은 육체적 고통보다 한 영혼을 처절히 짓밟는 장면이다. 이 때 이두한 역에 완전히 빙의 되더라. 어떤 고문보다 처절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더 세게 감정 표현을 하지 못한 게 좀 아쉽다. 정 감독님이 '너 그러면 한국에서 못산다'고 하시더라. 아직도 아쉬움이 있다.

- 촬영하며 흔들린 순간은 없나.

▲ 딱 한 번 원상이 눈이 강아지 눈처럼 안쓰러워 보이더라. 정말 당혹스럽고 흔들리게 됐다. 그러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했다. 박원상과 같은 소속사인 권해효는 극 중 김계장이 술을 먹으라고 권할 때 원상이가 '저 술 못합니다'라고 말 할 때 감정이입이 확 깨져 버렸다고 하더라.(웃음)

- 최근 몇 년 영화 출연은 했지만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은 10여년 만에 처음이다.

▲ 그렇게 말하면 이전에 불러 준 젊은 감독들에게 예의가 아니다. 정 감독님이 내게 멘토 역할을 깊게 하신 것은 사실이다. 감독님 또한 힘든 시간이 길었잖나. 그동안 저를 많이 불러 주셨다. '경영아, 혼자 있지 말고 밖으로 나와'라며 챙겨 주셨다. 이번에 메일까지 직접 보내시며 "이제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응시해라. 본격적으로 충무로에 원대 복귀하는 작품이 되면 좋겠다"고 하셨다. '남영동'이 공개된 후 다양한 자리에서 동료 영화인에게 진심어린 격려를 받았다. 영화라는 숲은 내 자리를 늘 따뜻하게 만들어 두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그 숲으로 돌아왔으니 잘 자라는 일만 남았다.

- '남영동'이 본격적 복귀작인가.

▲ 오랜만에 복귀하니 현장서 내가 제일 나이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과 융화하기 위해 부지런히 애를 쓴다. 그랬더니 편하게들 받아 준다. 젊은 세대들로 바뀌었지만 영화 현장이 주는 유대감은 변하지 않았다. '후궁' 때 내시 역할이다 보니 대기 시간이 길었다. 그 시간에 짜증이 나거나 지루한 게 아니고 그 시간을 즐기는 나를 발견했다. 나중에 김대승 감독이 '형한테 가장 고마웠다. 형이 자리를 지켜줘서 큰 힘이 됐다'고 하더라. '작게라도 그런 존재가 되어가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드니 이제 내가 돌아가야 할 시점이라고 느껴졌다. 갑자기 '남영동' 때문에 돌아온 게 아니고 소소한 과정들이 이어져 오다가 이제 정면을 응시하고 영화를 긍정적으로 대할 시점이라 생각했다.

- 차기작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 하정우 등과 찍은 '베를린'이 개봉을 앞두고 있고 용산 참사를 다룬 '소수의견'이 남았다. 이러다 정말 좌파로 찍히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웃음) '26년'도 개봉을 앞뒀고 윤종빈 감독의 '군도'가 내년 촬영에 들어간다. 얼마 전 장준환 감독과 술을 마시는데 10년 만에 작품에 들어간다기에 나도 모르게 짠해져서 김윤석 등이 나오는 신작 '화이'에 아버지 역으로 특별 출연하기로 했다.

저작권자 © 스포츠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