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브픽션'은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을 위한 영감을 불어넣어 줄 뮤즈를 찾고 있는 채식주의자인 소설가(하정우)와 알라스카에서 오랜 시간을 살았기에 '겨털'을 한 번도 깎아 본 적 없는 사진작가이자 영화 수입사 직원(공효진)의 전혀 알콩달콩하지 않은, 잠시 반짝하다가 이내 심드렁하고 결국 살벌해지는 연애의 실체를 그려낸 독특한 로맨틱 코미디다.

사실 '러브픽션'은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를 붙이기에도 살짝 망설여질 정도로 사랑의 달달함에 집중하기 보다는 '연애를 대하는 남자의 자세'에 대한 연구서에 가깝지만, '저런 사랑 고백 대사는 한 번 써먹어 보고 싶다'고 느껴질 정도로 구미를 자극하는 유려한 문어체의 대사들과 하정우, 공효진 두 주인공의 재기발랄하고 설득력 있는 연기에 힘입어 극장가 대표 비수기인 3월 로맨틱 코미디 최초로 개봉 5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동원하고 개봉 3주차인 현재 168만 관객을 동원하며 젊은 여성 관객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러브픽션'이 손익분기점인 120만 관객을 돌파한 지난 8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연출자인 전계수 감독을 만났다.

전계수 감독은 '러브픽션'의 제작 비하인드 스토리에 대해 "하정우가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이다. 그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고 지금과 같은 흥행 결과도 하정우 덕분이다"라며 "여주인공 캐스팅 진전이 안됐는데 '복덩이' 공효진의 수락 후 영화의 제작 과정이 술술 풀렸다. 효진 씨를 처음 만난 날 '우스갯소리로 (겨털)숱은 많으신가요'라고 물었다가 민망스러운 경험이 있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 효진씨가 너무 아름다웠다는 평들이 많아서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 개봉 5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예상한 결과인가

▲ 전혀 예상 못했다. 그저 내 바람은 개봉 첫 주에 1위를 하는 거였다. 기사를 보니 로맨틱 코미디 중 가장 빠른 흥행이라더라. 제가 겸손해서 이런 말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영화의 흥행은 전부 하정우와 공효진 등 배우들 덕인 것 같다.

- 2월에 '범죄와의 전쟁'과 동시에 개봉할 뻔 한 적도 있는데.

▲ 정말 개봉 타이밍도 좋았다.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해서 정작 개봉까지 5년이 걸렸다. 그동안 운이 잘 안 따라 준다고 생각했는데 그 운이 이번에 다 따라 준 것 같다.

- 영화가 처음 공개됐을 때 '재미는 있지만 일반 대중들에게 통하겠나'라는 평들이 많았다.

▲ '대중들이 이런 영화를 좋아하겠냐'는 일부 비평을 관객들이 와장창 깨줬다. 감독들이 개봉 스코어에 민감해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얼마나 흥행 했느냐에 따라 다음 영화를 제작하게 되는 기간이 정해진다. 그 텀이 훨씬 단축된다고 할까. 나만 해도 '삼거리 극장'을 찍고 나서 TV영화나 단편 작업도 했지만 일반 상업 영화로 돌아오는데 6년이 걸렸다.

- '러브픽션'의 개봉 일주일 후 하정우의 결별설이 터졌다.

▲ 저도 결별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우씨도 언제까지 묻어 두고 갈 수는 없었나 보다.

- 하정우가 '러브픽션' 제의를 수락하고 4년이나 의리를 지켰다던데.

▲ 하정우는 이 영화의 시작이자 끝이다. 그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고 지금과 같은 흥행 결과도 그의 덕분이다. 하정우가 일본에서 '보트'를 찍고 있을 때 시나리오를 보냈다. 책을 보고 나서 "너무 재미있다. 같이 하고 싶다"였다. 그 때 제작자 엄용훈 대표와 함께 홍대에 가서 둘이 파티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캐스팅을 수락하고 하정우가 끝까지 기다려줬기에 엄 대표나 저 모두 희망을 가지고 그 긴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하정우란 배우는 여러 모로 매력적인 사람인데 자기가 한 말을 끝까지 지킨다. 국토대장정을 한 것도 그렇고 그가 사람들에게 주는 신뢰가 연기의 안정감으로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

- 이런 스토리를 처음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 알랭드 보통의 소설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가 사랑에 대한 단상을 담은 에세이가 있다. 연애를 하는 남자와 여자를 위트 있게 바라본 시각이 참 재미있었고 그런 태도나 직관을 흉내 내 보고 싶었다.

- 하정우가 연기한 구주월이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이나 독백 장면에서의 대사들이 장난이 아니더라. 전 감독이 실제 소설가 나 문학청년이 아니었을까 추측될 정도다.

▲ 보통 인문계에 다닌 남자들은 다들 좀 글을 끼적거리지 않나. 대학(서강대)에 다닐 때 연극반 활동과 춤패(문선대) 활동을 했는데 그 때 대본은 전부 내가 썼다. 번역극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았고 전부 창작극이었다. 믿지 않으시겠지만 신촌 로터리 한복판에서 춤 공연을 한 적도 여러 번 있다.

- 구주월이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이 멀어버렸다" 같은 문어체 문장을 사용하도록 한 이유는.

▲ 구주월이 현재 연애하는 한국 남자의 보편적 모습을 표방하면서도 다른 측면이 있었으면 했다. 스스로 자기가 뛰어나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는 면을 주고 싶었다. 말도 잘하고 글발도 있는데 다른 것에는 젬병인 사람이 하는 연애라면 보편적이면서도 새로운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영화의 목표가 연애하는 남자의 심리학 또는 인간학을 세우는 것이어서 연애하는 단계에 대한 코멘트가 필요했다. 그래서 자기 연애를 말로 정리할 능력을 주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소설가로 설정했다. 소설가라는 직업 자체가 근대적이기도 하고 그래서 클래식한 연애관을 가지는 캐릭터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 알랭드 보통 외에 참고한 영화나 소설이 있나.

▲ 존 쿠삭과 잭 블랙 주연의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나 우디 앨런 영화들을 참고로 했다. '사랑도…'는 두 주인공이 음악을 통해서 영화 얘기를 풀어 간다. 우디 앨런 영화들의 주인공들은 상당히 수다스러운데 한국 로맨틱 코미디 특유의 과묵하고 멋있는 남자 주인공 대신 끊임없이 실수하고 수다를 떠는 말 많은 캐릭터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기존 로맨틱 코미디들과는 다르게 가고 싶었다.

- 주월과 희진(공효진)이 이별 후에 다시 이어지기는 했지만 사실 해피엔딩이라고 보기는 어려운데.

▲ 달달한 만족감을 가질 수는 없을 거다. 연애에 대해 인텔리겐챠하게 분석한 영화니까. 사실 폭넓은 지지를 받는 대중 영화를 만들겠다는 욕심도 있었고 거짓 없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대중들이 꼭 판타지만을 원할까. 이 영화가 남녀의 사랑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 공효진에 의하면 하정우가 세미 누드신 촬영 당시 전라 노출도 감행했다던데.

▲ 처음에는 팬티만 입고 의자나 소품으로 가리는 방법으로 사진을 찍을 계획이었다. 사진작가와 보조 하는 분, 그리고 나 총 세 명이서 그 장면을 촬영했는데 내가 '정우씨 한 번 다 벗어보면 어떨까요'라고 제안을 했다. 처음엔 정우씨가 난감해 했지만 이내 '그러죠 뭐'라고 답하더라.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속옷까지 다 벗고 온갖 포즈를 취하더라. 그 때 '이 사람이 정말 배우구나' 했다. 쉽지 않았을 텐데 이내 다른 촬영과 마찬가지로 정성을 다했다.

- 극 중 '사랑한다'는 표현을 '방울방울해'라고 하는데 이런 아이디어는 어떻게 나왔나.

▲ 제가 시나리오를 쓰는 스타일이 트리트먼트를 먼저 쓰지 않고 그냥 시나리오를 1신부터 쭉 쓴다. 그 때 '방울방울해'라는 표현을 떠올렸다. 희진이 '액모 부인'의 내용을 알아서는 안 되기에 주월에게 필명이 필요했다. '방울방울해'가 주월이 연애의 가장 빛나는 시기에 최선을 다 해 만든 표현이라면 '양방울'은 두 사람의 관계를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모욕적인 표현이라 괜찮을 것 같았다. 당시 일본 음악가인 양방언씨도 한창 활동 중이어서 이상한 이름은 아니겠다 싶었다.

- 주월은 진짜 희진에게 31번째 남자였을까.

▲ 나 자신은 그것이 사실이기를 바란다. 내가 몇 번째 남자인지 물어보는 남자의 한심함을 드러내기 위해 그 부분을 넣은 거다. 하지만 주월 스스로 자신이 31번째 남자임을 인지하고도 알라스카 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으면 했다. 여자의 과거를 문제시하는 자체가 성숙되지 못한 행동이다. "네 과거의 모든 일들 때문에 네가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온 거다. 네 모든 순간을 사랑한다"고 해놓고 결국 과거를 문제시 하지 않나.

- 전계수 감독 자신은 여자의 과거에 대해 전혀 문제의식을 갖지 않나.

▲ 네.(확신에 차서)

- 공효진 왈 전계수 감독이 첫 만남에서 '겨털은 잘 기르고 계시죠'라고 물어 황당했다던데.

▲ 그 부분은 효진씨의 기억과 내 기억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부산영화제에서 하정우의 소개로 처음 만난 날 거리를 좁히고자 "잘 기르고 계시죠, 숱은 많으신가요"라고 물었는데 여배우에게 완전히 첫 인상을 망치고 말았다. 내 스스로는 분장으로 붙이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가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 하정우와는 어떤 방식으로 소통했나.

▲ 촬영 초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는데 시나리오에 있는 그대로 해주길 원하는지 인물을 같이 만들어가기를 원하는지 내게 묻더라. 물론 나는 후자 쪽이었다. 그럼에도 하정우는 늘 감독의 영역에 대해 매너를 지키며 신경을 썼다. 편집할 때도 주연배우임에도 코멘트 하기를 주저했다. 감독의 예술적 영역에 대해 상당히 신경을 썼고 감독의 연출 의도에 100% 맞추려는 태도였다. 모든 사람들이 주목하는 가장 핫한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좋은 파트너이고 좋은 친구였다. 거장 감독과 함께하던 신인 감독과 하던 그의 태도는 변함 없으리라 믿는다.

- 개인적으로 공효진이라는 피사체가 이렇게 아름다운 지 처음 느꼈다.

▲ 공효진은 알려진 것과 달리 꽤 여성스럽다. 뜨개질도 좋아하고 가끔 내가 힘들어 하면 위로해 줄려고 어깨도 주물러 줄 정도로 세심한 면도 있다. 연출자로서 내 자신에게 가장 걱정됐던 부분이 공효진 자신의 스타일을 잘 살려줄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었다. 결국 공효진 자신이 스타일리스트가 됐다. 공효진의 개인 스타일리스트가 모든 촬영이 끝난 뒤풀이 자리에서 '언니가 이렇게 예쁜지 몰랐다'고 했다더라. 나 스스로도 여배우를 예쁘게 그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 자신감을 얻었다.

- 차기작은 스릴러를 준비한다고 하던데.

▲ 제가 태어난 해인 1972년이 시대적 배경이고 남해의 소매물도라는 섬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그릴 예정이다. 소매물도 옆의 등대섬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20대의 젊은 형사와 50대 가톨릭 신부가 해결해 나가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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