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출신의 거장 라스트 폰 트리에는 인간 본성을 세밀하게 관찰해 끝까지 파헤치는 능력이 탁월한 감독이다. 한 인간이 테러리스트로 파멸해가는 과정을 그린 '유로파'(1992)부터 선의를 악의로 되갚는 인간의 추악한 내면을 깊이 있게 그린 '도그빌'(2003)까지, 그의 영화의 주제는 항상 자신이 고백하듯 '인간본성'이었다.

오는 14일 개봉하는 '안티 크라이스트'도 두껍게 장막을 친 인간의 본성과 마음을 꿰뚫는 영화다. 영화는 인간 내면에 내재한 잔혹성을 표현수위를 거르지 않은 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성기 훼손, 수위 높은 정사장면 등 선정적이고 잔혹한 장면들이 상당하다.

한국에서 개봉하는 버전은 미국 개봉판에 기초한다. 2009년 칸 영화제에서 상영된 감독 버전보다 20분가량을 삭제한 판본이다. 국내 개봉판은 미국 개봉판보다 20초가량을 더 삭제했다는 것이 배급사의 설명이다. 그래서 원 상영시간이 126분에서 약 105분으로 줄어들었다.

잔혹하고 선정적인 건 분명하지만 '안티 크라이스트'는 다양한 상징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적으로는 훌륭한 텍스트다. 인간 본성에 대해 세밀한 관찰력, 남성·이성·종교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등을 세련된 방식으로 포장했다. 무엇보다 주제를 밀어붙이는 감독의 힘이 압도적이고 프롤로그와 에피소드에서 보이는 강렬한 영상미학은 표현양식에서도 독창적이라 할 만하다.

갈피 잃은 눈발들이 휘날리는 어느 밤, 그(윌렘 데포)와 그녀(샤를로트 갱스부르)는 정사에 몰입한다. 몽유병에 걸린 어린 아들은 부모의 정사장면을 보다가 방향을 틀어 서서히 창가로 다가간다. 곧이어 창문은 열리고 아이는 눈발을 헤치며 지상으로 떨어진다.

아이를 잃은 부모는 시름에 잠긴다. 특히 아이의 엄마는 마음의 병이 깊어져 입원한다. 회복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자 심리치료사인 남편이 직접 나선다. 그는 아내를 데리고 고적한 산장으로 가 아내의 갈가리 찢긴 마음을 돌보기 시작한다.

영화는 프롤로그-비탄-고통(혼돈의 지배)-절망(여성살해)-세 거지-에필로그 등 6개의 장으로 이뤄져 있다. 어린 아들을 잃은 부부의 슬픔은 장이 계속될수록 가파르게 치고 올라간다. "계속 이렇게 아플까?", "앞으로 더 심해질 것 같아", "너무 아파"와 같은 그녀의 대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올라가는 감정의 파고를 여실히 보여준다. 더불어 영화가 비극으로 치달을 것이란 사실까지 암시한다.

불안감에 허덕이는 그녀와는 달리 남편의 반응은 그녀와 다르다는 점에서 영화는 흥미롭다.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인 그는 "비탄은 병이 아니야", "공포를 그대로 받아들여"라며 아내를 다그치기 시작한다. 그의 이 같은 태도는 아내의 말처럼 '오만할' 정도로 이성적이다.

영화는 오로지 그와 그녀 둘만을 등장시켜 둘의 세밀한 감정변화를 담는 데 집중한다. 한때 마녀 사냥을 연구했던 그녀는 점차 마녀처럼 미쳐가고, 그녀를 치료하고자 하는 가톨릭 신부 같은 남편은 오만으로 병들어간다.

기본적으로 밀턴의 '실낙원'의 테마를 가지고 온 이 영화는 아이의 죽음(실낙원)에 처한 부부의 모습을 통해 흘러가는 감정을 무질서하게 담는 데 주력했다. 영화의 제목이 이성과 질서를 상징하는 크라이스트에 반대되는 '안티 크라이스트'인 이유다.

아울러 영화는 '복낙원'을 꿈꾸는 주인공 남녀의 바람을 무참하게 저버린 채 단호하게도, 끝까지 지옥도만을 보여준다. 자신의 인생에서 '최악의 공항기'에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감독의 고백에서 짐작할 수 있듯, 영화의 정서는 처참하고, 우울하며 지독하기까지 하다.

미장센(화면구성)의 달인답게 화면구성은 탁월하다. 물샐틈없이 정교한 미장센부터 핸드헬드를 이용한 다큐멘터리적인 촬영까지, 트리에 감독은 다양한 화면들을 보여주면서 인물의 심리변화를 전달한다.

물론 소문대로 잔혹하고, 선정적이다. 성기 노출 장면도 있으며 다리를 송곳 같은 것으로 뚫는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장면도 그대로 보여준다. 다만 논란이 됐던 성기 훼손 장면은 국내 개봉판에서 삭제됐다.

이 영화로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샤를로트 갱스부르가 뿜어내는 강렬한 에너지와 할리우드의 연기파 배우 윌렘 데포의 섬세한 연기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안티 크라이스트'는 수작이지만 잔혹하고 선정적이라는 점에서 호불호가 엇갈릴 법한 영화다. 비위가 약한 사람은 보지 않을 것을 추천한다. (▶ 연예계 뒷얘기가 궁금해?)

저작권자 © 스포츠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