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추격자'서 살인마 쫓는 엄중호 역

'천의 얼굴'이란 말 밖에는 적절한 수식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드라마 '부활'에서는 맘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얼굴이더니 또 '인생이여 고마워요'에서는 딱 안아주고 싶은 40대 남편의 모습 그대로였다. "가드 올려"라며 동성애 코드를 가진 아들을 두드려 패던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의 폭력 아버지는 또 어떤가. 그러면서도 그는 징글징글한 부성애를 순간순간 드러냈었다.

배우 김윤석(40)에 대해 관객들이 기억하는 가장 인상 깊은 모습은 '타짜'에서 선보인 소름끼칠 정도로 차분했던 악한 도박사 아귀의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변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영화 '살인의 추억' 이후 평단과 언론이 만장일치로 엄지손을 치켜드는 스릴러물 '추격자'(감독 나홍진, 제작 영화사 비단길)의 히로인이 됐다. 비리로 물러난 전직 경찰이자 출장 마사지 업소를 운영하는 엄중호로 분한 그는 사라진 출장 마사지 사들을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한국 사회가 키워낸 괴물 지영민(하정우)이 연쇄 살인마라는 사실을 깨닫고 응징에 나선다. 무관심한 사회와 무능한 공권력을 대신해 절대악과의 한 판 싸움을 벌여 낸 엄중호에서 서서히 빠져 나오기 시작한 김윤석을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 평단과 언론이 만장일치로 이 영화를 칭찬하는 중이다. 기분이 어떤가.

▲ 좋긴 좋은데 아직 긴장을 놓을 수 없다. 스코어가 남아 있지 않나. 감사하게도 여기저기서 칭찬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덕분에 VIP 시사회 하고 나서 지인들과 거나하게 뒤풀이도 하고. 영화가 잘 안나오면 다들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술자리를 빠져 나가는데 이번에는 흔쾌히 참석하더라.

- 분위기가 이렇게 좋은데 그래도 아쉬움이 있나.

▲ 배우가 자기 작품에 아쉽지 않다면 그런 놈은 맞아 죽을 놈이지. 배우는 다 아쉽다. 연기가 완벽하다거나 100% 달성한다는 그런 건 없다. 그게 연기라는 직업의 불치병이다. 가장 큰 아쉬움은 영화를 순서대로 찍지 못했기 때문에 엄청난 계산을 해야 했다는 거다. 그래서 나홍진 감독이나 하정우와 얘기를 많이 나눴다. 정말 쉴 새 없이 대화를 했다. 그런 환경에서 오는 아쉬움들이 있다.

- 첫 촬영 장면이 뭐였나.

▲ 지영민이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비가 내리는 한 밤 중에 우산을 들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장면이다. 극의 중후반에 해당하는 장면인데 첫 촬영에 모든 감정이 응축된 걸 표현하려니 어땠겠나.

- 엄중호가 지영민을 교통사로로 처음 접했을 때 직감적으로 마사지사들을 납치한 주인공이라는 걸 알아채는 장면이 있다. 전화가 울리기도 전에 "4885 너지?"라고 묻는 대목에선 과장된 비약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 감독은 그 장면에 대해 논리성을 벗어나는 본능적인 감각이 촉수처럼 발동하는 순간이라 설명했다. 미진이의 차가 사라진 장소, 놈의 얼굴 표정, 손에 묻은 피 이런 모든 것들로부터 엄중호가 육감적인 깨달음을 얻은 순간이라고 생각하고 촬영했다.

- 나홍진 감독은 이 영화를 찍으며 다시 군대에 가고 싶을 만큼 힘들다고 했다. 영화 내내 뛰어다닌 당신도 그 정도의 고통을 느끼지 않았나.

▲ 물론 이번 영화처럼 체력의 한계를 느낀 작품은 없다. 결말 부분의 하정우와 결투신은 40시간을 연속으로 촬영했다.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상태에서 서로 싸움 장면을 찍었는데 쉬었다 가려면 분장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으니까 그냥 계속 가자고 서로 합의를 봤다.

싸움의 30% 정도는 합을 짰지만 나머지는 피부로 느끼는 대로 찍었다. 둘이 치고 박고 싸울 때 불과 얼굴의 2~3cm 위로 주먹이 왔다 갔다 했다. 그렇지만 전혀 사고 없이 다친데 없이 촬영을 마쳤다. 이건 서로 배려를 하지 않고는 절대 나오기 힘든 결과다. 실제로 가격해서는 안됐으니까. 그 긴장감 때문에 그 신이 끝나고 난 뒤 긴장감 때문에 심장이 압박 받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음대로 거친 숨을 쉬면서 하다가는 NG가 날수도 있었고. 그 장면을 찍고 나서 심장이 굉장히 힘들었다.

처음 차 사고가 나서 지영민과 만나는 신에서도 산 아래에서 달리기 시작해 산비탈에 올라 싸움을 하는 신을 중간에 끊지 않고 논스톱으로 찍었다. 영화에 나오는 전봇대를 붙잡고 구역질 하는 장면은 연기인지 실제인지 나도 구별이 안 간다. 그렇게 2~3회를 연달아 촬영했다. 달동네부터 부자 동네까지 서울 한복판을 원 없이 달려 봤다. 촬영하는 5개월 동안 몸이 특공대 몸이 됐다. 정말 끔찍할 정도로 달려봤다. 그래도 군대에 다시 가고 싶지는 않다.

- 엄중호라는 인물을 어떻게 설정했나.

▲ 운동이라고는 하나도 하지 않고 게으르고 대학노트에 장부를 적는 인물이다. 돈 들어오면 나누고 배고프면 자장면 시켜 먹고. 술 살 때문에 배도 나오고 뭐 한 때는 중고 외제차도 몰고 허영심도 적당히 있는 그런 인물로 설정했다. 적당히 지저분하고 적당히 야비한 사람이다.

- 6개월 동안 촬영하면서 실생활에서도 엄중호의 모습이 나온 경험은 없나.

▲ 촬영이 늘 아침에 끝나기 때문에 아침 8시에 촬영이 끝나면 집에 가서 자고 나오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두 딸내미와 잘 못 놀아주긴 했지만 집에서도 중호처럼 살았다가는 큰일 난다. 그러다간 아내에게(연극인 방주란) 밥도 못 얻어먹는다.

- 출연했던 영화와 드라마를 통 털어 실제 김윤석과 가장 닮은 인물은 누군가.

▲ '인생이여 고마워요' 1회 때 유호정에게 했던 모습이 가장 닮지 않았을까. 술 먹고 늦게 들어와서 트로트도 부르고 하며 뒤에서 아내 껴안고 애교를 부리는 그런 모습이 제일 비슷할 거다.

- 작품이 끝나고 가장 기억에 남는 팬의 반응은 뭔가.

▲ 드라마 '부활'의 천사장 역 이후 팬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그 때 엄태웅을 제치고 '데이트하고 싶은 남자 1위'도 해봤다.(웃음) 선물도 쏟아졌다. 팬클럽 회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던 건 '타짜' 때였다.

- 최동훈, 이준익, 나홍진 등 감독 운이 참 많다.

▲ 정말 그렇다. 개성 있고 능력 있는 감독들과 계속 함께 했다. 이준익 감독은 편한 사촌 형님 같은 분이다. 영화 찍는 내내 그 분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 분에게는 영화가 삶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혜영, 이혜준 감독은 정말 진지한 사람들이고 영화를 바라보는 신중함이 있다. 최동훈 감독과는 두 작품을 같이 했는데 정말 어마어마한 준비를 하면서도 표는 안내는 사람이다. 배우들을 굉장히 편하게 만들어주고 가장 재밌는 술친구이기도 하다. 박식하고 매너 좋은 신사다.

- 출연작 중 유치원생인 두 딸에게 보여주고 싶은 작품이 있나.

▲ 아직 딸들이 어려 내 작품을 보여주긴 이르지 않겠나. 어서 빨리 그 아이들이 자라기만 기다리고 있다. 조만간 가족들과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딸들이 그 날만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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