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즐거운 인생'서 40대 가장의 꿈과 애환 담아

역시 이준익(48)이다. 40대 남자들이 가슴에 꽁꽁 감춰뒀던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시원히 속아냈다. 잊혀진 그들의 꿈도 고스란히 뽑아 올렸다.

실직한 전직 은행원, 가족을 유학 보내고 홀로 남은 기러기 아빠, 대기업 부장에서 하루아침에 택배 기사로 전락한 가장. 이 세 남자가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활화산'이라는 밴드를 결성해 20대 청춘 시절의 꿈을 뽑아 올린다. 이준익 감독의 음악 시리즈 2부작 '즐거운 인생'(제작 영화사 아침)이다.

밴드 활동을 만류하는 아내에게 이들은 이렇게 답한다. "당신도 하고 싶은거 하고 살어"라고.

영화 속 '활화산' 밴드의 공연을 보고 있자면 어깨가 들썩이고 당장에라도 화면 속으로 빠져 들어 헤드뱅잉이라도 '한 판' 추고 싶어진다. 극장을 나서는 발걸음은 가볍지만 마음 속 한 켠이 묵지근 해온다. 감독은 자신과 동년배이자 선후배인 관객에게 분명한 질문 하나를 던진다. 당신 마음속에는 오늘 당장 실현할 수 있는 작은 꿈 하나가 살아 있냐고.

다음은 이준익 감독과 나눈 일문일답.

- 정진영, 김윤석, 김상호 등 주연 배우들의 연주 실력이 대단하다. 촬영 한 달 전부터 작은 방에 가둬 놓고 8시간씩 연습을 시켰다는 얘기가 들린다.

▲ 아니 자기들이 연습해놓고 왜 내 핑계를 대나. 화면에서 잘 보이려고 5개월 동안 주야로 연습해놓고…. 그러니 독한 '놈'들이다. 연주 장면에 일부러 풀 샷을 많이 넣었다. 그래야 배우들이 직접 연주한다는 게 보이니까. 어제 그 친구들이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라이브 연주를 했다. '…러브레터'에 출연했으니 진짜 실력이 드러나는 거다.

- '라디오 스타'에 이어 또 30~40대 남성들의 카타르시스를 끌어냈다.

▲ 영화는 한 시대의 현상을 어떤 인물을 내세워서 은유하는 작업이다. '라디오 스타'는 대스타였지만 한물간 가수에게 이 시대 남자들의 심리를 투영시켰다. 과거 젊었을 때 열정이라는 것이 넘치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겠나. 관객들은 자신의 한 때 그 열정을 영화에 대입시키며 공감대를 찾았다. '즐거운 인생'에서는 주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인물들을 통해 그들이 마음속에 품었던 꿈을 얘기했다. '즐거운 인생'에서 밤무대 가수로 활동하가다 죽은 친구(극중 장근석의 아버지)가 '라디오 스타'의 최곤과 닮은 모습이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 '즐거운 인생'의 주제는 40대 남자의 꿈인가.

▲ 여기 나오는 친구들은 음악이 직업이 아니고 가정에서는 가장이고 사회에서는 중견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지 못하고 해야 될 일을 하며 살아온 인간들인 셈이다. 지금 현재 대한민국의 중견인 40대들이 대다수 그렇지 않나. 과연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생각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어쩌면 해야 될 일에서마저도 밀려난 세대지. 김윤석이 맡은 성욱이처럼 허겁지겁 낮에는 택배하고 저녁에는 대리 운전하는 뭔가 버티고 있는 그런 인생이다. 지금쯤 그들은 꿈을 상실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까. 과거에는 사회적 성공이나 부자 되는 것이 꿈이었겠지만 이제는 사회적 성공을 꿈꾼다거나 부자가 되는 것도 수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아버렸을 거다. '진정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발견'이 영화가 꼭 주고 싶은 것이다. 꿈이라는 것의 실체는 망상과 다르다. "오늘 내가 이뤄서 즐거울 수 있는 꿈을 갖자" 이런 얘기다.

- 당신의 젊은 시절 꿈은 뭔가. 그 꿈은 이뤘나.

▲ 나는 미술이 꿈이었다. 전공도 미술을 했고. 그러고 보면 나는 꿈을 못 이룬 인간이다. 화가를 지망했으니까. 취미로나마 그림은 지금도 가끔씩 그리고 있다. 젊어서부터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상상은 해본 적이 없다. 인생 목표도 아니었고. 외화 수입도 하고 마케팅도 하고 배급도 하고 먹고 살려고 눈앞에 닥친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감독까지 오게 됐다. 갈팡질팡 허겁지겁 인생을 살다보니 감독이 돼버린 거다. 인생이 뭐 계획대로 되는 게 있겠나. 당신은 인생이 계획대로 풀리나.

- 주인공들은 악기 하나로 젊은 시절 꿈을 이룬다. 잘 다루는 악기가 있나.

▲ 그게 바로 내 콤플렉스다. 중학교 때 몇 번 기타를 띵가띵가하기는 했지만 결국 악기 연주 하나도 제대로 못 하고 나이를 먹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인생인가. 참 한심하다. 서양애들은 어릴 때부터 과외 대신에 악기나 스포츠를 하나씩 배운다. 영화에서 성욱이(김윤석) 처가 초등학생 아들을 수학 과외를 단독 교사로 바꿔주자는 내용이 나온다. 한마디로 과외비를 올려야 한다는 얘긴데 성욱이는 와이프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힘들어. 그리고 수학 좀 못해도 살어"다. 아이들과 아내를 캐나다로 유학 보낸 기러기 아빠 혁수네도 엽기적인 상황은 마찬가지다. 학원 안 보내려고 유학을 보냈는데 학원 스케줄 때문에 서울에 들어올 수 없단다. 이게 대한민국 교육의 엽기적인 현상이다. 부모들은 과도하게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식들 교육을 챙기지만 이런 교육이 아이들이 세상을 사는데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가르쳐줄 수 있나. 부모들이 아이들을 위해 희생한 시간은 또 어디서 보상받나. 부모는 아이들을 위해 자기 인생의 20년을 희생하고 거기에 보답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죄책감이라는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우리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된다.

- 사실성을 위해 영화적 재미를 아낀 느낌이 든다. 기성곡 중 '불놀이야', '한동안 뜸했었지'외에 더 대중적인 곡을 쓸 생각은 없었나. 음악적인 면에서 카타르시스를 좀 더 터뜨려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 이 영화에서의 음악의 목적성은 삶을 반영하는데 있다. 음악적으로 어떤 경지에 도달하려는 영화가 아니다. 그러려면 '벨벳 골드마인'이나 '헤드윅'을 찍었어야지. 둘 다 내가 수입한 영화다.(웃음) 이번 영화는 음악 지상주의를 위해 밴드를 만든 그런 영화가 아니다. 음악에서 좀 더 수준 있게 터뜨려주려 노력했다면 이 영화는 거짓말인 거다. 영화에 대해 아주 예의 없는 짓이 되는 거다. 그리고 '불놀이야'는 80년대 초반에 홍서범의 '옥슨 80'이 전국에 돌풍을 일으킨 곡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대중음악이 세대 간에 단절되는 사실이 참 안타깝다. 미국이나 일본은 20~30년 전 명곡을 지금 젊은이들도 다 알고 즐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젊은이들 중 '불놀이야'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지금 애들이 가장 좋아하는 동방신기를 20~30년 후 젊은이들도 좋아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이 돼야 한다.

- 방준석·이병훈 음악 감독에게 미리 주문한 내용이 있나.

▲ 오리지널 곡을 두 곡 작곡해달라고 했고 그렇게 나온 것이 '터질거야'다. 80년대 중반 변두리 대학교의 애들이 대학가요제 들고 나가서 탈락했을 법한 곡을 써달라고 했다. 너무 세련되거나 훌륭하면 안 된다는 단서를 달았다. 단 촌스럽고 단순하지만 그들의 열정만 보이면 된다고 했다. 영화를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터질거야'에는 세 가지 버전이 있다. 처음 촌스러운 원곡과 홍대 클럽에서 오디션을 볼 때 그리고 나중에 홍대에서 연주할 때가 다 다르다. 연주법도 다르고. '즐거운 인생'은 초반부는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발라드 록으로 중반 이후는 빠른 템포에 반복적인 리듬을 넣어 관객이 신나게 몸을 흔들 수 있는 록으로 가는 방향으로 설계했다.

- 주인공인 남성들에 집중한 까닭도 있겠지만 여성 캐릭터들이 단선적이라는 비판이 있다.

▲ 항상 내 영화에서 여자들이 소홀이 다뤄진다는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1시간 50분의 상업 영화 러닝 타임을 맞추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절대적인 일이 '선택'이다. 여성 캐릭터가 다소 왜소하고 아쉽게 여겨지기는 하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여자의 입장이 극속에서 많이 간과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걸 다 설명하려면 5시간짜리 영화가 나온다.

-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물론이고 백수 남편의 밴드 활동에 응원마저 보내는 기영(정진영)의 아내 같은 이가 실제 할까.

▲ 물론이다. 매우 이상적인 캐릭터이긴 하다. '즐거운 인생'의 에피소드 대부분은 현실의 일부분을 발췌한 거다. 하지만 기영이도 마찬가지다. 현재는 백수지만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20년 동안 매우 성실하게 근무한 사람이다. 퇴직금으로 주식에 2,000만원을 투자해 다 날리고 말았지만 어딘가로 도망가지 않는다. 기영의 아내는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기 때문에 이 가정은 당장 무너질 상황이 아니다. 그러니 삶의 낙관성도 유지할 수 있는 거다. 반면 성욱의 집은 아내도 전업 주부고 아이도 둘이기 때문에 더 절박하다. 그러다보니 밴드 활동에 반대해 가출도 하게 되고 그런 거 아니겠나.

- 항상 난관적이고 좌절하지 않는 기영의 캐릭터도 너무 이상적이지 않나.

▲ 천성적으로 낙천적인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 '즐어운 인생'에 대한 칭찬 한마디 해달라.

▲ 음악 영화 이전에 삶의 리얼리티를 추구했다. 각각 인물의 일상 속에서 조금씩 진정성을 들춰낸다는 게 내 스스로 생각하는 이 영화의 미덕이다. 꼭 웃겨 주고 감동의 쓰나미가 밀려와야 잘 찍은 영화인가. 마지막 조개구이 집에서 공연하는 그들을 보며 열광하는 관객들 뒤로 카메라가 쏙 빠지면서 한 번 안아주고 싶은 느낌이 든다. 나는 사람이 멋있다고 느껴질 때가 뭔가 몰두하고 있는 뒷모습을 볼 때다. 이들이 얼마나 멋있나. 영화를 이보다 더 어떻게 터뜨려주나. 그러면 스크린이 찢어진다. 이 영화에는 도망가거나 피하는 인물이 없다. 비겁한 사람이 없다. 기영이가 이렇게 말했다. "이혼 생각하지 마, 나 위자료 줄 돈 없어"라고. 이 정도로 가족을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런 진심을 구기고 구겨서 몰아 담은 거다. 웃긴 영화 보고 싶다고? 그럼 '개콘'을 봐라.

- 차기작 '님은 먼 곳에'에서도 정진영과 함께 한다. 감독의 페르소나라는 말이 맞나 보다.

▲ 정진영은 나와 같이 가는 영화적 동지다. 축구에서 보면 홍명보 같은 존재다. 스트라이커는 아니지만 홍명보가 없으면 게임이 안 된다. 이준기도, 김윤석도, 감우성도, 김상호와 장근석도 정진영이 빛나게 해준다. 세상에 이보다 빛나는 배우가 어디 있냐. 홍명보는 단 하나다. 그런 존재다. 정진영은.

- '장근석의 발견'이라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린다. 극중 장근석의 매력에 감독의 역할은 몇 %였나.

▲ 며칠 전에 여성지의 여기자를 상대로 근석이와 더블 인터뷰를 했다. 그런데 이 기자가 나는 안 보고 계속 근석이한테만 질문을 던지더라. 내가 그럴 줄 알고 일부러 근석이를 영화에 많이 안 넣었다.(웃음) 여자들이 다 근석이만 보고 있을 거 아냐. 사실 동방신기보다 낫다.(이 말은 기사에 꼭 넣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장근석이 훨씬 낫다. 내가 근석이에게 주문한 건 딱 하나다. "20대에는 비판하지 마라, 젊은 시절에 비판 정신이 크면 꼭 배워야 할 걸 놓칠 수 있다"고. 연기적인 면에서는 속마음을 들키지 말라고 했다. 근석이가 맡은 현준이는 속이 깊은 아이다. 자신은 홍대 클럽에 팬들도 있을 만큼 잘나가는 아이지만 밴드 경험이 일천한 40대 아저씨들에게 어떤 자랑도 하지 않는다. 그냥 말없이 이끌 뿐이다. 그러니 더 멋있는 거다.

- '즐거운 인생'의 개봉도 안했는데 차기작 '님은 먼 곳에'의 캐스팅 소식이 들린다.

▲ 내 성질이 급해서 그렇다. 내 성급함 때문에 주변 스태프가 더 힘들다. 주로 내가 사고치고 이들이 수습하느라 바쁘다. '라디오 스타'가 한물 간 스타에게 음악이란 무엇인가를 다루었다면 '즐거운 인생'은 오늘 중년들에게 음악이 무언 지 현재성을 이야기했다. '님은 먼 곳에'는 그보다 훨씬 과거인 월남전을 배경으로 한다. 우리나라 최초로 외국에 군대를 파견한 월남전을 배경으로 한국군에게 위문 공연을 간 밴드의 이야기를 다룬다. '한국의 밴드'라는 아이콘을 다룬 음악 영화 3부작의 마지막이다.

- 드디어 여자가 주인공이다. 수애의 캐스팅 배경이 궁금하다.

▲ 수애는 영화 '가족'에서 잠재력을 발견했다. 입으로 대사를 내뱉지 않고도 그 인물의 내면을 관객들이 정확히 흡수할 수 있게 하는 연기자다. 그건 아마 그 친구가 기술로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수애라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면을 솔직하게 보여줬기에 가능했을 거다. '님은 먼 곳에'에서 수애가 맡을 역은 삼대독자 종가집의 맏며느리이자 월남전에 남편을 찾아 위문 공연을 가는 밴드의 일원이다. 이번에는 봉건 사회의 잔재가 남은 시대적 배경하에 한 여자의 자존심이 승리하는 이야기를 그릴 거다. 남자들의 폭력적인 관습에 '싸대기'를 날리는 영화가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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