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토크] 사진찍기 자제, 배우는 신비로움 간직해야
캐릭터서 한발 빠져나와야 관객과 호흡… "블랙코미디 가족영화 알리고 싶어 나섰죠"

무뚝뚝해보이고 투박하기 이를 데 없다.

배우 천호진은 스틸카메라 앞에 자신을 내세우기조차 부담스러워 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인터뷰를 마다하지 않고 나서게 된 데에는 뭔가 사연이 있어 보였다.

인터뷰 장소에서 만난 천호진은 예상대로 매서운 눈빛을 앞세우고 무언가 할말을 잔뜩 품고 있었다.

천호진은 한국 영화계의 획일화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자신만의 연기관까지 거침없이 털어 놓았다. 거칠고 직설적인 표현이지만 영화에 대한 그의 진심만은 그대로 묻어나왔다.

천호진은 영화에는 소재의 다양성과 휴머니즘이 필요하다는 평소 소신에 따라 영화 (감독 정윤철)에 출연했다. 이번 영화는 그의 표현에 따른다면 ‘국내 유일의 블랙 코미디 가족 영화다.

그가 연기하는 심창수는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무기력한 인물이다. 영화는 서로에게 무관심해 보이는 가족의 구성원이 점차 그 속내를 드러내면서 숨겨왔던 사랑을 드러낸다는 가족애를 소재로 하고 있다.

자칫 고만고만한 가족 영화라고 오해할 수 있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과 화면 구성은 신선하고 독특해 개봉 전부터 충무로의 주목을 한몸에 받고 있다.

늦겨울과 새봄의 정취가 교차하는 어느날,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천호진의 진심을 들어봤다.


▲인터뷰를 잘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믿을 지 모르겠지만 배우라고 모두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사진 찍히는 것만큼 불편하고 하기 싫은 일은 없을 정도다.

사진을 찍기 좋아하는 배우가 있으면 그 반대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배우에게는 신비로움을 지켜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배우 개인에 대한 것들을 죄다 까발리고 나면 결과적으로 극에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 관객에게도 득이 안 된다는 이야기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인터뷰를 꺼려왔다. 하지만 이번 영화만큼은 내가 직접 나서서 알려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필요성이라면 어떤 것을 말하나?

요즘 들어 좋은 영화가 만들어 져도 관객을 만날 기회를 박탈당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다양한 소재를 영화로 옮기려는 시도가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돈이 되는 영화만이 극장에 걸리는 것 같다. 는 대작도 소작도 아니다. 그 중간 정도 규모의 영화다. 영화가 가족을 바라보는 시각도 새로웠다. 이런 영화라면 관객들이 꼭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들었던 느낌은.

이 영화는 코미디라는 형식을 통해 사람 사이의 소통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대본을 보면서 블랙 코미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들이 화면에서 진지하게 연기하는 반면 그 연기를 보는 이들은 풍자와 해학을 느끼고 웃을 수 있어야 블랙 코미디다. 여태껏 제대로 블랙 코미디를 표방하는 영화가 없었다.

영화 작업하는 사람들이 그동안 단 것만 관객의 입에 던졌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 이 영화는 씁쓸한 맛이 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영화가 제작돼야 한국 영화의 소재가 다양해질 것이라고 생각해 반드시 출연해야 할 영화라고 생각했다.


▲캐릭터가 강한 작품이다. 어떻게 소화했나.

어떤 배우는 작품에 출연할 때면 캐릭터에 빠져든다지만 난 거기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편이다. 캐릭터에 함몰되면 관객에게 영화의 여백을 느낄 여유를 주지 못한다고 믿고 있다.

배우는 캐릭터에서 한발 빠져 나와서 객관적이어야 한다. 감정이입이 많이 필요한 멜로 드라마는, 그래서 나한테 어려운 작업이다.

요즘 젊은 배우들은 관객에게 여지를 주지 않고 스스로 모든 것을 표현하려 하더라. 울어야 한다, 웃겨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갖고 연기하는 경향이 있다.

영화가 관객과 호흡을 하려면 여지를 남겨둬야 한다. 남겨진 부분은 관객의 몫이다. 이번 영화는 그런 면에서 관객에게 낯설 수 있지만 사실 친절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공감가는 부분이 있다면.

식탁에서 아빠가 아닌 엄마가 맨 첫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장면이 유독 눈에 들어오더라. 인류의 근원을 따지면 모계 사회였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런지 엄마가 맨 윗자리를 차고 앉은 걸 보니 괜히 보기 좋더라. 우리집에서도 아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 보면서 ‘내가 집사람에게도 자리 하나를 줬구나’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 때는 청춘 스타였는데.

아주 찰나였다.(웃음) 1983년 MBC 공채 탤런트로 연기를 시작했다. 영화 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탤런트 시험을 봤다. 덜컥 합격했다.

TV 드라마에 출연하다 1986년 로 영화에 처음 출연했다. 그 당시 남들이 말하는 인기라는 걸 조금 경험했다.


▲오랜 연기 생활 동안 기복이 있었을 법 한데.

젊은 시절에는 어느 배우나 기복이 있기 마련이다. 동료가 앞서 가면 시샘도 나고, 나만 뒤쳐지는 게 아닌가 불안해 진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한참 후에야 영화를 시작하고 좋은 감독들을 만나서 연기를 하다 보니 마음이 편안해지더라.


▲20년 넘게 연기 생활을 해올 수 있던 원동력을 꼽는다면.

특별한 비결은 없다. 굳이 찾자면 20년 넘게 배우 생활을 하면서 경력이 차곡차곡 쌓인 것이다. 배우는 커리어(career)가 중요하다. 경험에 비춰본다면 요즘 젊은 배우들이 ‘리얼하다’라는 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는 것 같다.

영화나 드라마는 분명히 현실은 아니다. 실제처럼 보이도록 ‘리얼리티’(reality)를 구현할 뿐이다. 그 차이를 경험에 의해 알게 됐다는 게 배우로서 큰 자산이다.


▲캐릭터에 접근하는, 나름의 방식이 있다면.

소위 말하는 ‘변신’은 한계가 있다. 관객들이 내가 출연하는 작품의 캐릭터에서 미묘한 변화와 차이를 발견한다면, 그야말로 고마운 일이다.

오래 전 캐릭터 분석에 대한 조언을 유인촌 선배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캐릭터를 정확히 분석해 내려면 리포트를 쓰라고 하시더라. 어떤 이든지 내가 쓴 리포트를 보기만 해도 곧바로 연기를 해낼 수 있을 정도로 써야 한다고 충고하셨다.

처음에는 우습게 봤다. 하지만 실제로 시도해 보니 캐릭터 이름 하나 쓰고 나니 더 쓸 말이 없더라. 그래서 무수하게 노력했다. 몇 년이 지나니까 10여 페이지를 넘길 수 있을만큼 쓰게 되더라.


▲배우로 인생을 마치기 전에 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미국 드라마 같은 작품을 하고 싶었다. 국내 드라마로 비교한다면 정도가 될까?

죽기 전에 관객에게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작품을 남겨주고 싶다. 그래서 휴머니즘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면 얼마든지 출연할 의사가 있다.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은,

를 가족 영화로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다. 그동안 진짜 가족 영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영화는 보는 이들이 저마다 자신의 가족의 현실을 반추해볼 수 있는 계기를 주는 작품이다. 가족 모두 함께 보고, 서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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