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뛰어넘은 캐릭터 3번째 연기… "무대에 서면 아직 부족함 느껴요"

연기는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삶을 채워넣는 것이라고 했던가.

배우 이전에 한 인간으로 세상살이의 모진 풍파를 겪어내면서 그 배우의 연기도 서서히 무르익어가기 마련이다. 데뷔 20년 만에 자신만의 선 굵은 연기로 재조명 받고 있는 배우 허준호가 그렇다.

허준호는 드라마, 뮤지컬, 영화를 넘나들면서 중견 배우의 거센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다.

허준호는 판타지 대작 ‘중천’(감독 조동오ㆍ제작 나비픽쳐스)에서 가족을 잃은 한(恨)을 품고 부패한 권력에 대항하다 죽음을 당하는 왕실 퇴마대장 반추로 등장한다.

반추는 사후(死後) 죽은 영혼이 머무르는 중천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절대 악으로 그려진다. 영화는 허준호의 소름 끼치도록 섬뜩한 내면 연기로 시종일관 관객들이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만든다.

허준호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반추는 어떤 인물인가?

=반추라는 인물은 명분이 확실한 악역이다. 요즘 관객은 우연이라는 설정은 용납 못한다. 그래서 더 어려웠다.

부패한 권력에 대항하는 명분은 확실하고, 가족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나 역시 3년 전에 개인적으로 큰 사고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반추를 연기하면서 공허한 마음을 채워넣을 수 있었다. 뭐랄까? 정말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지만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지 않은가? 연기를 통해 대리만족을 한 기분이다.


▲천상이라는 공간 속 배역을 연이어 맡았는데.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이 많아지면서 영적 세계나 종교 세계에 관심이 많아지는 나이다. 어떻게 살아가는 게 내게도, 주변에게도 도움이 될까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많이 던진다.

공교롭게 드라마 ‘주몽’의 해모수나 현재 하고 있는 뮤지컬 ‘마리아 마리아’에서 예수 역을 맡아 모두 저 편에 계신 분들을 연기하게 됐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캐릭터를 설정하는데 어려웠다. 최대한 인성(人性)에 가깝게 그리려고 노력했다.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역시 CG가 많이 들어가면서 상상으로 시작해서 느낌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반추가 나타나면 지축이 흔들리고 음산한 냄새가 나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조동오 감독이 사진이나 그림을 많이 준비해서 도움이 됐다. 하지만 촬영에 임할 때만 해도 잘 모르겠더라. 어떻게 나올지 감이 안 잡히니까.


▲영화를 보고 난 후 기분은?

=CG는 기대했던 것 이상이다. 정말 훌륭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부족함을 느낀다.

늘 작품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커서 마음이 괴롭다. 신파적 요소를 쳐내려 했는지 내가 나온 장면이 좀 편집이 됐더라.

좀 아쉽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감독의 몫이다.


▲관객이 어떤 마음으로 극장을 떠나면 좋겠는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배우가 감히 관객의 영역을 놓고 뭐라 할 수 없다. 관객이 알아서 느끼고 판단할 부분이다. 사실 ‘재미있게 봐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억지다.

관객의 수준은 이제 정말 무시 못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하나의 소품에도 반응한다. 영화가 밋밋하면 욕먹어도 할말없다.

난 나이가 들수록 나쁜 얘기를 귀 열고 더 들으려고 한다. 그래야 나쁜 소리를 적게 들으면서 연기할 수 있다.


▲뮤지컬 제작자가 된 이유는.

=83년쯤 우연히 한 작품을 봤다. 그때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다. 저게 도대체 뭐냐고? 연극 같은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더라. 정말 신기했다. 아마도 문화적인 충격을 받은 듯하다. 그 작품이 ‘가스펠’이었다.

항상 마음에 품고 있고 관심을 가져오다 4,5년 전에 알았다. 우리 민족이 원래 뮤지컬과 통한다는 걸 말이다. 열린 무대에서 함께 어우러져서 노래하고 춤추고 공연하던 마당극이 원래 우리 문화더라.

그래서 더욱 애착이 갔다. 당장은 수익을 못 내더라도 한 십년 바라보고 할 작정이다. 내가 연기자로 10년 됐을 때 사람들이 알아줬던 것처럼.


▲감독에는 뜻이 없나?

=내 인생의 목표는 나이 40세에 제작을 맡고, 50세에 연출자가 되는 것이다. 지금도 천천히 단계를 밟아가고 있다. 당장의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때를 기다리고 천천히 준비하다 보면 좋은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만든다면 아마도 한국판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에 액션이 대거 가미된 영화가 될 것이다.(웃음)


▲배우인 아버지(故 허장강) 앞에 자랑스러운 아들이 된 것 같은데.

=사람들은 아버지에 대해 희극적인 요소를 많이 기억한다. 하지만 사실 모든 분야를 하신 분이다. 페이소스가 가득한 연기를 하셨다. 나는 아직 부족하다. 혹시 십년 후면 모르겠다.


▲부족하다는 말을 반복하시는데.

=음, (잠시 생각하다) 무대에 서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가진 한계가 무엇인지 대번에 알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는 사실 반복적으로 촬영하면서 모자라는 부분을 채울 수 있다.

하지만 무대는 의지할 데가 없다.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발성과 움직임 하나가 달라진다. 난 여전히 무대 위에서 내 모자라는 부분을 느낀다. 연기는 끝이 없다.


▲술을 끊었다고 들었다.

=지난 3년의 세월 동안 30년 마실 술을 다 마신 것 같다. 원래 술을 즐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기간에는 술을 마시지 않고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술을 입에 부었다. 하지만 이제 술은 끊었다. 한 3개월 됐다. 대신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하루에 2,3시간 꼭 운동하고 있다.


▲앞으로 욕심이 나는 배역이 있다면.

=코미디 얘기를 하는데 물론 잘 해낼 자신도 있고 해보고 싶다. 하지만 그보단 양들의 침묵’에서 안소니 홉킨스가 연기했던 한니발 박사 같은 걸 해보고 싶다.

처음부터 끝까지 악한 역에 매력을 느낀다. 표정 없이 목소리로 소름 끼치고 섬뜩한 그런 역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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