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세계서 재회한 연인 가슴저린 사랑 그려…

‘선택’과 ‘집중’이라는 만고의 진리는 우리네 삶 속에 자주 인용된다.

경제원리를 따질 필요도 없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기로에서 선택과 집중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 영화라는 이야기에도 예외일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얻기 위해서 내용의 취사 선택은 물론 힘 조절도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중천’(감독 조동오ㆍ제작 나비픽쳐스)은 선택과 집중이라는 덕목에 충실했다. 또한 충실했어야 하는 작품이다.

영화는 주인공 이곽(정우성)이 자신을 대신해 죽은 연인 연화(김태희)와 사후세계에서 조우하면서 시작한다. 허망하게 놓친 사랑을 다시 찾게 해준 하늘에 감사라도 해야겠지만 이미 그녀는 이승의 기억을 다 잃었다.

이곽은 다시 만난 사랑을 이번에는 반드시 지켜내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이승에서 인연을 맺은 동료들과 숙명적으로 대결하는 처지에 놓인다. 영화는 죽은 영혼이 49일간 머문다는 중천을 배경으로 두 남녀가 벌이는 사랑 이야기다.

영화는 장쾌한 액션과 국내 영화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첨단 CG기술을 덧입었다. 국내 불모지나 다름 없는 판타지 장르에 순수 제작비 104억원이 투입됐다.

영화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CG 작업을 위해 내로라하는 국내 12개 업체가 매달렸다. 영화는 엄청난 제작비와 국내 기술진의 품을 헛되게 하지 않았다. 두고 두고 회자될만한 영상미와 CG 기술을 유감없이 선보였다.

현란한 액션을 선 보였던 3D 캐릭터 ‘정우상’을 찾아 보는 덤도 잊지 않았다. 공을 들인 만큼 영화는 관객의 시신경을 끊임없이 자극하며 자랑할만한 겨울철 오락 영화 한편을 탄생시켰다.

관객 만족 최우선이라는 서비스 정신에 기반한 볼거리를 충만하게 제공했다는 것은 중천이 선택을 통해 집중했던 대목이다. 이 지점에 대한 큰 이견은 없을 듯하다.

다만 선택에서 벗어나 힘을 받지 못한 대목에 대한 부질없는 아쉬움 또한 여전하다. 사실 중천은 볼거리 못지 않은 철학적 메시지를 담을 수 있었던 작품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승의 연화와 중천의 소화를 동일 인물로 규정한다. 영화의 어느 장면에도 두 인물이 동일하다는 설명은 없다.

실제로 동일 인물일 수도 있지만 외모가 흡사한 두 인물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위대한 사랑의 힘을 설파하는 시시한 영화가 아니라는 게 제작자의 변이다.

영화는 인간의 기억에 대한 밀도 높은 메시지를 전하려고 한다. 이곽은 이승의 기억을 잃은 소화에게 연화의 모습을 보기 위해 집착한다. 두 남녀의 사랑이 육신의 존재가 아닌 기억에 의해 진행됨을 보여준다.

소화는 연화의 옷을 입고 쓰러진 이곽을 간호하고 영화의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이곽은 3만 원귀 앞에서 연화가 아닌 소화라고 부르짖으며 달려간다.

영화는 이들에게 기억에 얽매인 사랑에서 벗어나 자신의 앞에 놓인 존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해탈의 과정을 보인다.

그럼에도 심도 깊고 세밀한 심리 묘사가 볼거리에 힘을 모두 소진시키면서 이곽의 검에 스러지는 윈귀처럼 순식간에 존재를 잃어간다.

주연 배우들의 편집에 대한 볼멘소리는 심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제작진으로는 선택과 집중 원칙을 고수하기 위한 제작진의 고육지책으로 받아들여진다.

러닝타임이 1시간30분으로 대폭 줄어든 것은 관객에 대한 배려다. 하지만 편집 때문으로 불쑥 튀어나오는, 어딘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 듯한 소품은 관객을 당황하게 만든다.

뜬금없이 이곽 손에 들려진 진홍빛 비단천이나 기억을 잃었다는 소화가 보관하고 있는 연화의 옷은 영화 어디에도 그 의미를 찾을 단서가 없다.

뿐만 아니라 반추가 이곽을 왕실 퇴마부대인 처용대에 들이자마자 채 곧바로 제일 퇴마사로 임명되는 장면이나 동료대원인 묘(소이현)가 이곽에 연정을 품는 장면은 관객 입장에서는 주입식 설정에 불과하다.

대사를 통해 상황 설명만 이어가는 소화 역에 대한 평가는 연기력 부재 논란이 아닌 연기력을 보일 기회마저 없었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다.

한계점과 아쉬움은 있지만 중천은 그 시도 자체가 한국 영화사에 큰 의미를 남기고 있다. 한국 영화계에서 척박한 판타지 장르에 호기 좋게 도전했고 나름의 성과를 가시적으로 드러냈다.

달걀의 밑부분을 깨뜨려 곧게 세우고야 말았던 콜롬버스의 용기를 보는 듯하다. 걸음마를 뗀 분야에 대한 열정을 높이 산다면 질책보다 사랑이 필요한 작품이다.

판타지의 첫 손에 꼽는 ‘반지의 제왕’을 3년을 거쳐 기다렸던 한국 관객의 여유와 관대함을 잃지 않는다면, 혹여 우리 손으로 만든 ‘제2의 중천’을 볼 날도 멀지 않았다. 20일 개봉.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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