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짱] 영화 '열혈남아' 설경구

뭔가 보여줄 것이라는 믿음과 신뢰를 주는 배우는 흔치 않다. 그 대열에 설경구라는 이름이 빠질 수 없다. 그가 밟아온 이력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배우 설경구는 세상의 주변에서 아픔을 가슴 깊이 간직한 채 살아가는 인물을 누구보다 잘 소화해 왔다. 9일 개봉되는 ‘열혈남아’(감독 이정범ㆍ제작 싸이더스FNH)에서 설경구가 그려내는 외톨이 조폭 재문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재문은 인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저열하고 비겁한 인물이다. 재문이 세상을 부정할수록 관객들은 가슴 속에 뜨거운 정을 느낄 수 있다. 이 복잡미묘한 설정은 설경구라는 광기어린 배우가 아니면 쉽게 표현되기 어려웠을 터이다. 배우 설경구를 지난 10월31일 서울 인사동 인근에 위치한 한 건물의 근사한 스위트룸에서 만났다.

▲전형적인 설경구 표 캐릭터 같다.

=누가 그러더라. 거저 먹은 것이 아니냐고. 글쎄 (잠시 생각하다) 연기가 그렇게 쉬운 건 아니다.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어떤 부분이 쉽지 않았나?

=초반에 캐릭터를 분석할 때 고충이 좀 있었다. 혼선이 있었다고 할까? 시종일관 눙치면서 가야하나? 순간 힘을 팍 줘야 하나? 두 갈래에서 고민이 많이 됐다.

▲결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눙치면서 갔다. 가슴 속에 천불이 나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능글능글하게 갔다.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다음 작품 때문에 약간 감량하고 있다. ‘역도산’ 이후로 내 체중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 티나게 빼거나 늘리지 않으면 아예 얘기도 안 한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라고 본다. 이번 작품은 그냥 있는 그대로 큰 변화 없이 여유를 가지고 준비했다. 술도 많이 마시면서(웃음)

▲작품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시나리오를 보면서 영화 끝부분에 나문희 선생님 대사 중에 ‘이놈아, 뭐가 그렇게 서러워서 자빠져 울고 있냐’라는 대사가 가슴에 와서 박히더라. 재문이라는 인물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결정했다.

▲재문이라는 캐릭터는 어떤 인물인가?

=서러운 게 많은 인물이다. 의지 할 곳도 없고 조직 내에서도 인정 못 받고 홀대 받는 위치에 있다. 하지만 약한 척을 하지는 않는다. 속은 썩어 들어가도 아닌 척하면서 끝까지 간다. 치국(조한선)하고 태권도 대련 장면 찍을 때 문득 든 생각인데 상당히 비겁하다. 언제나 상대방의 등 뒤를 노린다. 칼을 쓸 때도 주먹을 쓸 때도 상대방이 방심한 틈을 노려서 등뒤에서 공격하는 놈이다. 호기 있게 눈빛으로 상대를 제압해야 한다고 치국에게 가르치지만 정작 자신은 치국마저도 뒤에서 공격하는 비열하고 치사한 인간이다.

▲극중 점심 캐릭터를 실제 어머니와 비교한다면 어떤가?

=전혀 반대다. 우리 엄마는 기다리지 않는다. 아들한테 적극적으로 말씀하신다. 촬영장에서 전화 거는 쪽은 엄마의 몫이다. 난 먼저 전화 안 한다. 오히려 배역에 몰입하는데 방해 요소였다.(웃음)

▲힘없고 소외받는 역을 주로 맡는 이유는.

=사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대개 주변인이다. 힘있고 배운 사람도 있긴 하다. 사연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야 관객도 공감도 쉽다. ‘공공의 적’에서는 강력반 형사, 검사도 해봤다. 하지만 많이 배운 역은 재미가 없다. 나하고는 안 맞고 어렵다.

▲그동안 맡았던 캐릭터는 무겁고 어려웠던 것 같은데.

=많이 무겁다. 하지만 내가 그런 역만 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못한다. ‘오아시스’에서 주변에서 어떻게 보든 자신들은 즐겁고 행복하지 않았는가? 오히려 ‘박하사탕’ 이후 매체가 내 이미지를 한쪽으로 몰아간 측면이 있다. 내 대표작은 여전히 ‘박하사탕’이지만 그 틀에서 내가 가둬지는 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럼 어떤 역할을 맡아보고 싶은가?

=코미디를 하고 싶다. 왜 나는 코미디와 안 맞다고 말하는 지 이해가 안 된다.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향은 줄 수 있을 법하다. 난 그런 사명감이나 메시지를 위해 영화를 하지 않는다. 즐겁게 일하고 즐겁게 관객이 봐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그래서 코미디 하고 싶다. 내가 예전에 연극 무대에서는 알아주는 코미디 전문배우였다. 오히려 그 당시 지인들은 ‘박하사탕’의 이미지가 낯설다고 할 정도다.

▲다음 작품은 코미디인가?

=아쉽게 아니다.(웃음) 다음 작품은 과학수사드라마 ‘에이전트 제로’다. 예전부터 하고 싶었지만 사전 제작시스템이 아니면 엄두가 나질 않았었다. 표현의 규제가 그나마 자유로운 케이블 매체라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앞으로 어떤 매체든 좋은 소재가 있다면 얼마든지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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