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영화 '가을로'의 세진 역… "잘하지 못하면 안하느니만 못한 거죠"

한 때 MBC에서 휴일 낮 결혼적령기 남녀들이 나와 맘에 맞는 이성과 '짝짓기'를 하는 '사랑의 스튜디오'가 인기리에 방송된 적이 있었다.

메인 사회자는 임성훈이었고 여성 MC는 종종 바뀌었다. 이런 류의 프로그램에는 보조 MC가 흔히 따라붙는데 당시 소위 방송인이라고 불리는 그 정체성이 애매한 젊은 보조 MC들이 방송을 어색해하는 참가자들의 장기자랑을 도와 분위기를 살리는 역할을 하곤 했다.

엄지원에 대한 기억은 그때가 처음이다. 벌써 7년도 넘은 이야기지만 항상 스크린에서 엄지원을 볼 때면 개인적으로 당시 그 발랄했던 모습이 종종 연상되면서도 당시에는 나중에 저 사람은 자신의 '주전공을 뭘로 할까?'하는 궁금증이 생겼었다.

대개는 그렇게 방송인이라는 타이틀로 활동하다가 화면에서 사라지는 일이 다반사였기에 나중에 다시 못볼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엄지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부단한 노력이야 말로 해 뭣 하겠냐마는 방송인에서 연기자, 배우로 거듭나고 있는 그 뚝심과 연기에 대한 열정은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되는 부분이다.

이후 영화 '똥개'(2003년)를 통해 비중있는 역할로 연기력을 보이면서 '주홍글씨' '극장전' 그리고 이제는 김대승 감독의 '가을로'로 연기 농도 짙은 배우로 차츰 자리를 굳혀가는 모습이 뚜렸해지고 있다. '야수'의 우정출연까지 하면 영화들도 만만찮다.

좋은 감독님들과의 작업 福이 많아요

그동안 보여준 역할이 다소곳하고 여성미 물씬 나는 캐릭터였다면 처음 비중있는 역할이었던 '똥개'에서의 까칠한 정우성의 이복 동생 역 '김정애'는 엄지원의 평소 모습을 많이 닮았다고 한다. 활달하고 적극적이고 털털한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솔직한 자기 모습이란다.

'친구'이 곽경택 감독과 찍은 '똥개'나 '주홍글씨'의 변혁 감독, '극장전'의 홍상수 감독 그리고 이번에는 '번지점프를 하다'의 김대승 감독까지 긴시간이 아니었고 많은 연기를 보여준 것이 아니었음에도 엄지원은 감독 복이 많은 편이다.

엄지원은 스스로도 "감독님 복과 배우 복은 참 많다는 걸 인정해요. 그 덕분에 '주홍글씨'때는 부산영화제 페막작으로 레드카펫을 밟았고 '극장전'으로 칸느 영화제도 가봤고 이번에는 '가을로'가 부산영화제 개막작이었으니... "

그런 엄지원을 레드카펫 단골 배우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다. 김대승 감독과는 어떻게 뜻을 같이 했을까? "제가 출연했던 '극장전'같은 영화를 좋게 보셨다며 출연을 권유하셨죠. 저도 감독님의 '번지점프를 하다'와 '혈의 누'를 재미있게 봤고요. 쉽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감독님 믿고 결심했어요."

스스로 자랑스럽고 부끄럽지 않은 영화 하고 싶어요

'가을로'의 세진은 참 어려운 역할이다. 평생을 두고 악몽같은 참사에서 생존하면서 떨쳐낼 수 없는 트라우마 같은 고통을 시시때때로 느끼는 상처를 '업고 사는' 여인이다.

무엇보다도 '삼풍백화점 참사'라는 실제 대형사고에서 살아남은 몇안되는 생존자의 역할을 해내야 했다. 1995년 엄지원은 당시 고등학생이었다. 대구 출신의 엄지원인지라 뉴스로 외에는 특별히 많은 것을 체득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결국 그것이 과제였다.

"어떤 캐릭터보다도 세진은 감히 경험해볼 수 없고 그 느낌을 살려내는데 어려움이 많은 인물이었어요. 감독님과 당시 다큐멘터리도 찾아보고 뉴스도 다시 살펴보고 심리학 서적까지도 뒤적여 봤죠. 제가 세진을 체득하는 농도를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었어요. "

게다가 민주(김지수)와 함께 백화점 함몰지역에 갇혀서 고통속에 버티는 장면은 가장 캐릭터의 진정성을 살리는데 어려운 숙제기도 했다. "그래도 영화가 울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참담한 경험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상처를 보듬어주면서 결말지어져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더라구요. 그래서 이 영화가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엄지원은 이번 영화를 통해서도 또다른 연기 진폭의 유연성을 보여주고 있다. 앞선 영화들에서처럼 엄지원을 자꾸만 배우로 보게끔 만드는 매력은 오로지 그녀의 집중된 연기력과 진지함에서 비롯되고 있다.

"어떤 감독님과의 작업, 어떠한 시나리오가 들어오더라도 결국 내가 선택하고 임한 작품에서는 스스로 자랑스럽고 부끄럽지 않은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나중에 다시 보더라도 고전이 될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데 참여했으면 더 바랄게 없을 것 같아요. 아쉬운 부분이요? 왜 없겠어요. 그래도 전 항상 지금, 오늘에 만족을 느낀답니다."

영화를 찍는 1년여의 긴 시간동안 스스로도 성숙해진 느낌이라는 엄지원, 다음이 또 궁금해지는 배우로서의 기대감은 그녀가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갑작스럽지만 진실된 느낌이 배어나오는 감정에 충만한 눈물을 보며 더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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