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짱] 헹디엔 '중천' 촬영 현장서 만나다

정우성은 중국과 매우 익숙해 보이는 배우다. 지난 2000년 영화 ‘무사’ 촬영 당시에도 9개월 가까이 중국 생활을 했고, 지난 해 9월부터 6개월 동안 영화 ‘중천’의 촬영도 중국에서 진행하고 있다. 최근 개봉된 영화 ‘데이지’에서 중국인 유위강 감독과 함께 작업한 경험도 있기에 중국과 잘 어울린다는 선입관을 가질 만했다.

그래서 ‘중천’의 중국 헝디엔 촬영 현장에서 만난 정우성에게 “중국 생활이 익숙하겠다”라고 첫 인사를 던졌다. 그러나 돌아오는 정우성의 대답은 “익숙할 수 없다. 영화 촬영이니 받아들일 뿐이다”였다. 우문현답인가. 아무튼 한방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나이들수록 사랑 욕심 줄고 영화 욕심 쑥쑥
캐릭터 완성해 나갈때마다 짜릿한 쾌감
영화는 삶 자체… 기회 있으면 연출하고 싶어

정우성은 근사했다. 전날 오후부터 이날 아침까지 이어진 고된 촬영을 마치고 곧바로 인터뷰 현장으로 달려 왔기에 피곤에 찌든 얼굴이 다소 초췌해 보였지만, 입가엔 시종일관 여유로운 미소가 감돌았고 차분한 어조는 듣는 이를 편안하게 몰입하도록 했다.

‘아, 여인네들이 이 사내에게 열광하는 건 다 이유가 있구나!’

정우성은 “촬영 현장은 내겐 최고의 놀이터”라고 말했다. 아무리 고된 환경이라도 촬영하는 순간 만큼은 즐겁기만 하다는 게 정우성만의 영화 사랑 표현법이다. 그래서인지 50분 남짓 인터뷰 시간 동안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는 정우성은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 영화는 기억이다

정우성은 자신의 영화 세계를 ‘기억’이라는 단어로 집약했다. 지난 1994년 영화 ‘구미호’로 데뷔해 12년 동안 20편 가까운 영화에 출연한 순간순간의 기억들이 자신을 배우로 완성시켜 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데뷔작 ‘구미호’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이제 배우가 됐다’는 행복감이 개봉된 뒤 ‘내가 이것밖에 안되나’하는 좌절로 바뀌었었다. 이후 나는 순간순간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돼지꿈으로 시작했다가 악몽으로 바뀐 ‘구미호’의 기억도 지금에 와선 풋풋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정우성은 ‘중천’의 주제도 ‘기억’이라고 했다. 이승에서 사랑을 나눴던 두 남녀가 중간계에서 사랑했던 기억을 되찾는 과정을 다룬다는 설명이다. 퇴마무사 이곽으로 등장하는 정우성은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헤어진 연인 소화(김태희)와 중천(이승과 저승의 중간계)에서 재회한다.

소화는 이승의 기억을 모두 잃은 천인(天人)이지만 운명적 사랑 앞에 조금씩 기억을 되찾아 간다. 그러고 보면 정우성이 지난 2004년 출연했던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와 정반대 모습의 기억이다.

“많은 작품에 출연하면서 항상 작품 사이의 연결 고리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중천’의 경우 ‘무사’, ‘내 머리 속의 지우개’와 연관되는 부분이 있다. 달리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너무 의식하다가 어색해지지 않는 게 숙제라 할 수 있겠다.”

# 영화가 삶이 돼 간다

정우성도 어느덧 3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 반려자를 만나 가정을 꾸미기에 그다지 이른 나이가 아니다. 사랑과 결혼에 대해 물어봤다. 그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사랑 욕심은 줄어들고 영화 욕심이 늘어난다”고 했다. 혼기를 넘긴 연기자들이 흔히 말하는 “연기와 결혼하겠다”는 대답과 비슷한 듯하지만 왠지 정우성이 말하니 달라 보였다.

“30세를 넘기면서 사랑에 대해 겸손해졌다. 항상 영화 속 사랑의 판타지에 휩싸여 살아왔기 때문일까. 그래서인지 실제 사랑보다 영화 속 사랑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 게 일 때문에 사랑에 소홀해지는 상황인가. 지금 생각엔 계속 쉬지 않고 영화를 찍고 싶다. 출연도 계속하고 싶고 기회가 오는 대로 연출도 하고 싶다.”

정우성에게 영화가 삶이 돼가는 것은 그의 작품 선택 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데뷔 이후 시나리오를 받아본 뒤 출연을 결정한 작품이 ‘내 머리 속의 지우개’, ‘데이지’, ‘새드 무비’ 단 3편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인간 관계로 인해 출연을 결정했다. ‘중천’ 또한 8년전 영화 ‘비트’에서 인연을 맺은 뒤 ‘태양은 없다’, ‘유령’, ‘무사’ 등에서 함께 한 조동오 감독의 데뷔작이라는 점에 아무런 고민 없이 선뜻 출연을 결정했다.

“삶은 행복해야 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나는 인간적 교감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실패도 있었다. 그러나 되는 작품만을 찾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순수한 마음으로 내가 꿈꾸는 캐릭터의 완성을 추구하며 짜릿한 쾌감을 느끼고 싶다.”

인터뷰 말미에 약간 장난을 곁들여 “거울을 보면 스스로도 반할 정도로 멋지다는 생각이 드느냐”고 물어봤다. 정우성은 화통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멋지기 위해 거울을 보진 않는다. 다만 작품에 잘 어울리는 나를 만들기 위해 거울을 본다”고 대답했다. 끝까지 우문현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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