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거즈 김정수. 스포츠코리아 제공
[스포츠한국 김성태 기자]타이거즈는 한국시리즈를 가면 패한 적이 없다. 가을야구의 왕자이자 챔피언의 DNA를 가지고 있다. 큰 경기에 유독 강했다. 해태 시절에 아홉 차례나 우승을 따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러다 보니 여름에 주춤해도 가을이 되면 이상하게 강해지는 선수들이 있었다. 야구는 8회까지 지고 있어도 9회에 역전해서 이기면 된다. 마지막에 이기는 사람이 승자다. 아무리 잘해도 한국시리즈에서 패하면 결국 2등이다.

타이거즈는 가을에 유독 잘 던지는 투수가 있었다. 폼이 독특하다. 살짝 발을 들면서 왼손으로 휙 던진다. 당시에 보기 힘들었던 좌완 강속구, 더불어 사이드암에 가깝다. 직구 구위만 놓고 보면 당시 선동열 못지않았다.

인상이나 스타일도 유독 반항아 느낌이 강했고 피칭도 기복이 심했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에 나오는 주인공 '까치'라는 별명이 잘 어울린다. 여기에 한 단어가 더 붙는다. 날이 추워지면 더 강해진다. 바로 '가을까치' 김정수(58)다.

가을에 유독 공을 더 잘 뿌린 김정수. 보기 드문 왼손 강속구 투수였다. 스포츠코리아 제공
가을에만 강했다고? 투수로 18년이나 뛴 선수가 김정수

1962년 화순에서 태어났다. 광주남초, 전남중을 거쳐 진흥고를 나왔다. 원래는 고교 1년까지 목포상고를 다녔는데 해체되면서 진흥고로 왔다. 청소년 시절부터 알아주던 투수였다. 1979년 목포상고 1학년 때 봉황대기에서 두 경기 연속 완봉승을 기록, 존재감을 과시했다. 해태 김동엽 감독의 눈에 들게 된 계기였다.

진흥고에 와서도 빠른 강속구를 지난 왼손 투수로 유명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나간 대통령배 2회전 경기에서 박노준의 선린상고를 만나 승리를 거뒀고 황금사자기에서 혼신의 투구를 펼치며 팀을 결승까지 이끌기도 했다. 경북고에 패하긴 했지만 대회 감투상을 받은 김정수의 주가는 팍팍 올랐다.

본인은 고등학교 졸업 후, 해태 입단을 원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연세대로 갔다. 졸업 후, 1986년 해태에 입단했다. 첫 시즌, 41경기에 나와 9승 6패 5세이브 평균자책점 2.65를 기록했다. 소화한 이닝은 125.2이닝이었다. 당시 팀 내 투수 중 가장 많은 경기에 나왔다. 대졸 신인의 첫 시즌이었지만 실력은 이미 팀 주축이었다.

1987년부터 1995년까지 꾸준히 100이닝 전후를 소화하면서 공을 던졌다. 하지만 이상하게 두 자릿수 승수는 적었다. 5~6승이 대부분이었고 1992년 14승과 1993년 10승이 유일한 두 자릿수 승수였다. 대신 평균자책점은 2점대 중후반에서 3점대 초반 언저리를 유지했다.

기복은 심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강했다. 증거 중 하나가 바로 마무리 보직 전환이다. 벼랑 끝 승부, 단 1구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자리가 마무리다. 1996년 들쑥날쑥했던 제구를 잡는데 성공한 김정수는 40경기 76이닝을 던져 6승 3패 18세이브 평균자책점 2.01을 기록, 그 해 세이브 리그 4위에 오르기도 했다.

1986년을 시작으로 1999년까지 무려 14년을 타이거즈에서 뛰었다. 1983년 첫 우승을 제외, 선수로만 무려 여덟 번(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1991년, 1993년, 1996년, 1997년)의 우승을 경험했다. 우승반지 8개를 갖고 있는 타이거즈 우승의 산증인이다.

이후 FA를 선언했지만 갈 곳을 찾지 못했다. 간신히 재계약에 성공한 후, SK로 이적했다. 전성기가 지났지만 원 포인트 투수로 나와 알짜배기 활약을 했고 한화를 거쳐 SK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통산 600경기 1394이닝 92승 77패 34세이브 33홀드 평균자책점 3.28을 남겼다. 1980년대 중반에 야구를 시작, 2000년대 초반까지 공을 던졌다. 무려 18년을 투수로 뛰었다.

1986년 한국시리즈 MVP의 주인공이 된 김정수. 시리즈에서 홀로 3승을 따냈다. 연합뉴스 제공
한국시리즈 7승의 신화, 대졸 신인 최초 한국시리즈 MVP

김응용 감독은 김정수의 구위를 보며 내심 놀란 적이 많았다고 한다. 불펜에서 공을 던지면 어떤 날은 선동열 보다 직구 구위가 좋아 보였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여기에 고등학교 시절에 한-일 고교초청대회에 국가대표로 가서 커브를 배워왔다. 빠른 공과 절묘한 변화구를 지닌 왼손 투수, 그게 김정수였다.

그를 대표하는 것은 '한국시리즈 최다승 투수'라는 타이틀이다. 까치에 '가을'이라는 단어가 붙은 이유다. 프로 입단 첫해인 1986년, 그는 후반기에 마무리로 뛰었고 허리가 아파서 한국시리즈 전까지 피칭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결정적인 순간에 마운드에 올라갔다.

1986년 해태는 삼성과 한국시리즈를 치렀다. 1차전 선발은 선동열이었다. 6회까지 무실점, 7회 들어 2점을 내줬지만 다시금 공을 뿌렸다. 그러다 9회에 한 점을 더 내주면서 3-3이 됐다. 10회 말, 김응용 감독은 승부를 걸었다. 김정수를 마무리로 투입했다. 그렇게 2이닝 4탈삼진 무실점을 기록, 팀의 한국시리즈 1차전 승리 투수 타이틀을 따냈다.

2차전에도 나왔다. 선발 차동철에 이어 2.2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팀은 패했지만 김정수의 구위는 위력적이었다. 그리고 3차전, 선발 이상윤이 1회에만 3실점을 하며 무너지자 김정수가 다시금 마운드에 올라섰다. 그렇게 5이닝 2실점 호투를 펼치며 팀 승리를 이끌었고, 또다시 한국시리즈 승리 투수가 됐다.

5차전에서는 선발로 나왔다. 5이닝 5피안타 2실점을 기록하고 뒤이어 선동열이 나와 경기를 끝내면서 팀은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시리즈에서 3승을 챙긴 투수, 대졸 신인 김정수는 그렇게 1986년 한국시리즈 MVP가 됐다.

다음 해인 1987년 한국시리즈에서 김정수는 삼성과 다시 만났다. 2차전 선발로 나온 김정수는 7.1이닝 1실점 호투로 승리, 이어 4차전에서도 5회부터 나와 9-2의 리드를 지켜내며 한국시리즈 승수를 추가했다. 그렇게 18년을 선수로 뛰며 한국시리즈에서만 7승 3패 1세이브를 기록, 역대 한국시리즈 최다승 투수가 됐다. 가을의 DNA, 김정수가 원조였다.

지난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의 한국시리즈 시구를 옆에서 도와준 김정수 코치(오른쪽). 청와대 제공
문재인 대통령의 엄지 '척'을 받은 가을까치 김정수

지난 2017년, KIA는 정규 시즌을 1위로 마치며 한국시리즈로 직행했다. 10월 25일, 광주 챔피언스필드에서 KIA와 두산의 한국시리즈 1차전이 열렸다. 경기도 경기지만, 화제거리는 따로 있었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의 시구 행사였다.

대선 당시에 정규시즌 우승 팀 구장에서 시구를 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던 문 대통령은 이를 실천하고자 광주에 왔다. 시구를 하려면 몸도 풀어야 하고 투구 폼도 지도를 받아야 한다. 그 때 문재인 대통령의 시구를 옆에서 도와준 것이 바로 김정수 코치였다.

함평챌린저스필드에 있다가 갑자기 연락을 받았다.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고 해서 급하게 광주로 왔는데 그 사람이 바로 문 대통령이었다. 한국시리즈 최다승 투수라는 기록을 갖고 있었기에 청와대 측에서 김 코치를 콕 찍었다는 후문이다.

그렇게 어안이 벙벙했던 김 코치가 연습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문 대통령이 나타났다. 문 대통령은 곧바로 그를 알아봤고 환하게 웃으면서 악수를 청했다. 그러면서 "한국시리즈 최다승 투수"라며 엄지를 치켜들자 김 코치도 긴장한 듯 "예"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이어 김정숙 여사가 "멋진 포즈 좀 완성해 주세요"라고 하자 문 대통령은 곧바로 "좌완이야, 좌완"이라고 말하며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김정수라는 투수를 정확히 알고 있기에 가능한 발언이었다. 그렇게 김 코치는 15분가량 옆에서 문 대통령의 시구 연습을 도와줬고 무사히 행사를 마쳤다. 김 코치는 "투구 폼 지도가 필요 없었다"라며 소감을 말했다. 말 그대로 대통령도 알고 있는 '가을까치' 김정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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