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윤. 스포츠코리아 제공
[스포츠한국 김성태 기자]타이거즈는 타자가 강한 팀이었다. 원년부터 그랬다. 홈런왕 김봉연을 시작으로 투타 겸업의 김성한, 장효조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김종모, 원조 대도 김일권, 원년 홈런 2위 김준환까지 쟁쟁했다.

하지만 야구는 투수 놀음이다. 절대적인 포지션이다. 팀 내 확실한 에이스가 없다면 왕조는 커녕, 우승도 장담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투수는 야구의 꽃이며 이들에게 승수는 곧 자존심이었다. 두 자릿수 승수는 뛰어난 개인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다. 그러나 꿈의 '20승'은 다르다.

실력과 운, 그리고 팀이 모두 맞아 떨어져야 한다. 에이스의 승수는 개인이 아닌 팀 전체의 성적이다. 그렇기에 20승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역대 타이거즈에서 20승을 거둔 선수는 딱 세 명이다. 영구결번 18번의 주인공인 국보 선동열(1986년 24승, 1989년 21승, 1990년 20승), 그리고 2017년 'V11'의 주역인 왼손 양현종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이 있다.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투수다. 하지만 올드팬이라면 다 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잘생긴 외모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살림살이 하나 없이 가난한 해태를 이끌던 투수, 1983년 타이거즈 첫 우승 당시에 20승을 따냈던 에이스, 바로 이상윤이다.

해태 투수 이상윤. 날카로운 눈빛이 인상적이다. MBC 캡쳐.
해태에 긴급 수혈이 된 한양대 중퇴 이상윤, 타이거즈의 핵심 선발 되다

1960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광주일고 시절에 나름 유명했던 타자였다. 1976년 대통령배 대회에서 타율 5할을 기록하며 인상적인 활약을 선보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강한 어깨의 잠재력을 인정받고 투수로 바꿨다. 1978년 베네수엘라에서 열린 제10회 세계 청소년 선수권대회에 출전, 7승 2패 평균자책점 0.74를 기록하며 한국의 준우승에 큰 기여를 했다.

이상윤은 한양대로 진학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1982년 프로야구가 탄생했다. 고향팀 해태는 투수가 없어서 고민이었다. 유남호가 플레잉 코치를 할 정도였으니 5명이 채 안 되는 숫자였다. 실업야구도 아니고 프로야구 80경기를 소화하려면 젊은 투수가 절실했다.

찾아보니 한양대에 광주일고 에이스 출신 이상윤이 있었다. 아마 야구의 반발도 있었다. 하지만 프로야구를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컸다. 한양대 3학년이었던 이상윤은 계약금과 연봉 각각 1000만 원을 받고 해태에 입단했다. 갑작스레 중퇴를 한 것도 그렇고 대학 시절에 워낙 공을 많이 던졌기에 첫 시즌은 기대 이하였다.

1982년 첫해, 그는 23경기에 나와 102이닝을 소화하며 7승 5패 평균자책점 3.88을 찍었다. 모두 5경기를 완투했지만 성적은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하지만 1983년부터 팔꿈치 부상이 나아진 뒤, 제구가 잡히고 하체에 힘이 실리면서 특유의 내리꽂는 폼으로 빠른 속구를 던질 수 있게 됐다.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따내고 기뻐하는 이상윤. 타이거즈 제공
또 하나의 무기는 바로 포크볼이다. 속구의 제구가 잡힌 상황에서 낙차가 큰 변화구를 던지니 상대 타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 해, 이상윤은 46경기에 나와 229.1이닝을 던져 20승 10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2.67을 찍었다. 완투만 14번을 했고 완봉도 3번이나 있었다. 위기의 순간이 올 때마다 이상윤은 선발이든 중간이든 마무리든 다 나와서 던졌다.

해태는 이상윤의 활약에 힘입어 전기리그 우승에 이어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했다. 당시 한 일간지 기사에는 '마운드의 샛별 이상윤, 팔꿈치 고장으로 작년까지는 별 볼이 없었던 투수, 전 복싱 챔피언 김기수씨를 만나 체력 및 정신 훈련에 임했고 중국인 한의사에 침을 맞으며 승부근성을 배웠다. 181cm의 신장에서 내리꽂는 강속구는 시속 150km, 이제는 장명부와 맞먹는 피칭이다'라며 그의 활약상이 실리기도 했다.

이후 이상윤은 1984년 211.2이닝을 던지며 10승 13패 8세이브 평균자책점 2.85를 기록, 2년 연속 200이닝 이상을 던졌다. 그 여파로 1985년 2승에 그쳤고 1986년 10승 5패 평균자책점 2.97을 남겼지만 1987년 2승 4패에 그쳤다. 그리고 1988년 16승 6패 평균자책점 2.89에 이어 1989년 1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1983년과 1984년 2년간 440이닝이나 과하게 던진 것이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기복이 심했다. 한 시즌을 쉬고 다음 시즌에 잘하면 또 한 시즌은 개점 휴업에 들어갔다. 팀은 다섯 번이나 우승을 했기에 선수로 이룰 것은 다 이뤘지만 30살이 넘지 않은 젊은 나이에 은퇴를 했다. 지금처럼 철저히 관리를 했다면 충분히 더 오래 뛸 수 있었다.

이상윤. 스포츠코리아 제공
30승의 너구리 장명부에 가린 20승 이상윤

1983년 타이거즈 첫 20승 투수지만 그를 기억하는 팬들은 많지 않다. 팀 우승도 이끌었고 심지어 46경기 중 14경기를 완투했으니 기여도가 상당했다. 하지만 존재감이 다소 가려진 느낌이다. 이유가 있다. 20승 정도면 상식적으로 다승 1위가 정상이다. 하지만 1983년 다승 2위다.

승수에서 월등히 앞선 선수가 있었다. 바로 삼미의 '너구리' 장명부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 난카이, 히로시마 등에서 뛰었으니 차원이 다른 실력의 투수였다. 경험도 많았고 능수능란했다. 타자를 상대하는 요령이 상당했다. 흔히 말해 완급조절의 대명사였다.

1983년 그는 60경기를 나섰고 30승 16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2.36을 기록했다. 완투 36번에 완봉을 6번이나 했다. 소화한 이닝이 무려 427.1이닝이었고 잡아낸 삼진만 무려 220개였다. 아무리 동기부여가 강하다고 해도 당시 장명부는 인간이 던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한 시즌에 30승을 찍으니 20승 투수가 눈에 들어올 수가 없다. 이상윤이 빛에 가린 이유다. 그런 두 선수가 만난 경기가 바로 1983년 6월 7일 광주 삼미전이었다. 나란히 선발로 나왔다. 여기서 이상윤은 9이닝 10탈삼진 3피안타 1실점 완투를 기록, 장명부의 삼미를 완벽하게 누르고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다.

삼미를 거쳐 이글스에서 뛴 30승 투수 장명부. 스포츠코리아 제공
전기리그 막바지에 맞붙었던 두 팀의 중요한 승부처였다. 그렇게 해태는 이상윤을 앞세워 삼미를 잡고 3연승 획득에 성공, 전기리그 우승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이상윤은 한국시리즈에서도 불꽃같은 피칭을 펼쳤다. 무려 4경기에 나왔다.

1차전 선발로 나와 9이닝 8피안타 4사구 3개 4탈삼진 4실점을 기록하며 완투승을 따냈고 3차전 구원으로 나와 3.2이닝 1실점, 4차전에 선발로 나와 8이닝 6피안타 1실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5차전에 팀 마지막 투수로 나와서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고 우승을 장식했다.

비록 승수는 30승의 장명부에 10승이나 부족한 20승에 불과(?) 했지만 타이거즈 첫 20승 겸 한국시리즈 첫 승 투수, 그리고 타이거즈 첫 우승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낸 선수라는 점에서 이상윤은 에이스라는 명칭이 가장 잘 어울리는 투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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