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국 박대웅 기자] 허구연 MBC 해설위원의 대표적인 별명은 ‘허프라’다. 방송 중계마다 늘 인프라를 강조하는 모습에서 탄생한 명칭이다.

모든 대화가 ‘기-승-전-돔’으로 연결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지만 사실 허구연 위원은 본인의 돔구장 이야기에만 많은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다소 아쉽게 생각했다.

사진=박대웅 기자
오히려 그가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따로 있다. 돔구장 여부를 떠나 프로 선수들이 보다 좋은 환경에서 승부를 펼치고, 나아가 아마추어 선수들, 동호인까지도 자유롭게 야구를 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 조성. 그가 꿈꾸고 있는 야구계의 모습이다.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인프라 구축에 모든 열정을 쏟겠다는 허구연 해설위원의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들어봤다.

▶미국 방문, 인프라 외침의 시작

허구연 위원이 한국 야구의 인프라 문제에 대해 심각성을 제대로 느낀 시점은 미국을 다녀온 직후였다.

“1984년 LA 다저스의 스프링캠프장이 있었던 미국 플로리다 베로비치 히스토릭 다저타운에 갔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부터 야구를 하면서 일본은 100번 가까이 다녀온 것 같은데 우리는 그동안 일본 야구만 보며 따라잡기 위해 노력을 했었죠. 그러다가 미국에 가서 보니 정말로 크게 한 방을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시설을 보니 우리나라는 야구장이라고 말하기도 힘든 수준이었으니까요.”

피터 오말리 구단주, 토미 라소다 감독 등과의 대화를 통해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많은 것을 듣고 느꼈지만 야구장 시설은 허 위원에게 그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안겼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열리면서 잠실구장이 그나마 괜찮은 환경이었을 뿐 구덕야구장, 도원구장, 대전구장, 대구구장, 광주구장 등은 기가 막힌 수준이었다.

“프로스포츠를 하는데 인프라 구축이 없을 경우에는 발전이 없다는 것을 그 때 느꼈죠. 무엇보다 야구 팬들이 경기를 즐겁고 재미있고 편하게 봐야하는 것도 중요했고요. 그 때부터 인프라 이야기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 건립자문위원으로 활동했던 허구연 해설위원이 대구시로부터 감사패를 전달받는 모습. 스포츠코리아 제공
▶집요한 압박, 결실의 열매를 맺다

허구연 해설위원은 인프라를 시설과 인적 두 부분으로 나눈 뒤 시설 문제의 경우 방송을 하며 노력하기에 따라 변화를 이끌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고 밝혔다. 정치인들이 제발 언급을 그만해달라고 요청할 만큼 집요하게 경기장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고 또 꺼냈다.

“정말로 집요했죠(웃음). 김범일 전 대구 시장의 경우 제가 계속 방송에서 야구장 이야기를 꺼내고 ‘정치인은 못 믿겠다’고 하니까 정말로 짓겠다고 약속을 하셨어요. 당시 낙후됐던 대구 청사를 먼저 지을 예정이었는데 시청 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해 결국 야구장부터 짓기로 했고, 그렇게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가 탄생했죠. 지금도 김 전 시장에게 정말로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광주-KIA 챔피언스 필드 역시 강운태 전 광주 시장이 당선 전 공약에 야구장 건립을 넣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압박해서 나온 결과다. 허 위원은 “만약 시장에 당선되면 중계방송 옆에 모시겠다고 소위 빼지도 박지도 못하게 했는데 결국에는 정말로 모시게 됐다”며 뿌듯했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 밖에 울산, 포항, 마산, 수원, 익산, 고양의 야구장의 리모델링 등도 허구연 위원의 자문을 구해 완성된 결과물이다.

“포항의 경우 조금 특별한 기억이 있습니다. 처음에 자문을 해달라고 찾아왔는데 예전 동대문운동장처럼 원형으로 돼 있고 온통 시멘트로 발라놓은 모습이더라고요. 규모도 1만1000석 정도에 그쳤고요. ‘당신들이 다 정해놓고 왔는데 내가 자문할 것 없다’며 돌려보냈는데 이후 당선작을 취소하고 설계도를 다 바꿨어요. 이후 증축 설계를 감안해야 하는 점, 친환경적으로 가야하는 점을 이야기해줬고 시장께서 그런 부분들을 반영해주셨죠.”

허 위원은 포항 공무원들에게 자문을 했던 것들이 울산, 광주, 대구 등에도 영향을 미치게 됐다고 돌아봤다. 기계를 찍듯 구장을 똑같이 만드는 것이 아닌 외야석에 잔디도 입히고, 예산 문제가 있을 경우 모래사장, 간이 수영장이라도 설치하는 등 구장마다의 특색을 가져가게 됐다는 것.

관중들의 뜨거운 반응 속에 공무원들로부터 고맙다는 연락이 올 때마다 열심히 뛴 보람을 느끼고 뿌듯함을 느끼는 허 위원이다. 최근에는 정헌율 익산 시장을 만나 KT를 위해 실내 야구장을 만들어주기로 했다는 기쁜 소식을 접했다며 그가 미소를 지었다.

“지자체장들의 경우 스포츠를 잘 모를뿐더러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스포츠의 비중이 크지 않기 때문에 제가 계속 나서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구단은 지자체의 을 입장이에요. 누가 나서서 하겠습니까. 결국 제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2019년 2월 완공을 앞두고 있는 창원NC파크. 연합뉴스 제공
▶창원NC파크와 대전 신축구장

2018년은 허구연 위원에게 특별한 의미가 담긴 해로 기억될 전망이다. 기존 광주, 대구에 새로운 야구장이 지어진데 이어 창원NC파크 역시 올해 2월 완공을 앞두고 있다. 허 위원은 2015년 10월 창원NC파크의 자문대사로 위촉돼 구장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함께 했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9구단 창단 때 수원으로 결정했다면 기존에 좋은 구장이 있었기 때문에 절차가 빨랐을 겁니다. 하지만 유영구 전 총재에게 수도권에 정치·경제·사회·문화와 관련된 것들이 밀집돼 있으니 지방에서도 문화를 공유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을 드렸죠. 롯데가 이미 경상도를 대표하고 있지만 마산에도 야구 팬이 많고, 또 마산·창원·진해 통합시가 되는 과정에서 스포츠를 통해 하모니를 이루는 게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완수 전 시장에게 창원시가 운동장을 지어주고 네이밍 라이트, 운영권, 광고권을 모두 (NC에게) 주겠다는 각서를 받아낸 뒤 기업주를 만나서 낙점된 팀이 바로 NC입니다.”

NC의 첫 출발을 떠올린 허 위원은 최근 창원NC파크가 명칭 문제로 논란이 있었던 점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지역민들의 뜻을 야구인 입장에서 간섭하기는 어렵지만 지역 이기주의나 자존심을 앞세우기보다는 최종 결정이 내려진 만큼 그에 맞춰 따라줄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조심스럽게 밝혔다. 또한 창원NC파크가 완공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창원시 공무원들의 경우 수시로 연락이 와서 어떻게 하면 운동장을 더 잘 지을 수 있느냐고 끊임없이 물어봤었습니다. 저도 전문가는 아니기 때문에 설계의 중요성 및 좋은 곳에 맡겨야 하는 점, 무엇보다 구단의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으라고 했습니다. 창원시가 갑의 위치일 순 있지만 갑질을 하는 순간 야구장은 엉망이 되니까요. 그래서 창원에도 메이저리그 스타일로 좋은 구장이 들어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는 부분이죠. 창원시 공무원들에게도 정말 고생 많았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허 위원이 야구장과 관련해 2018년 보람을 느끼는 또 하나의 사건은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대전 신축구장 역시 유치전 경쟁이 점차 뜨거워지고 있는 등 건립 추진에 탄력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는 6·13 지방 선거를 앞두고 대전시장 예비 후보들이 타 지역과 달리 야구장 신축에 미지근한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해 격분하며 폭탄 발언을 한 바 있다.

“올해는 제가 야구발전위원장이 아닌 직책 없이 총재 고문을 맡았기 때문에 사실 나설 일은 아니었죠. 하지만 일종의 감이라는 것이 있는데 결국 지자체장들이 선거 공약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실행으로 옮겨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대전 쪽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가 아무런 움직임이 없어서 화가 났었죠. 결국 KBO 총재가 승인하고 다른 구단들이 동의하면 대전을 떠나서 야구장을 짓겠다는 천안, 청주로 연고지를 옮겨야한다고 말을 했습니다. 이후 난리가 나서 4명의 후보가 모두 야구장을 짓겠다고 공약에 넣더라고요.”

말을 이어가던 허구연 위원이 잠시 보여줄 것이 있다며 가방 속에서 종이를 꺼내들었다. 허태정 대전시장의 야구장 신축 및 베이스볼 드림파크 조성 공약이 담겨있는 코팅물이었다.

“중계 때 팬들을 위해서 한 번 보여준 적이 있는데 계속 가방에 넣어 다닐 계획입니다. 만약 착공하지 않으면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며 계속해서 방송에 보일 생각이에요(웃음).”

허태정 대전시장의 야구장 신축 및 베이스볼 드림파크 조성 공약을 가방에 늘 보관하고 있는 허구연 위원. 사진=박대웅 기자
허 위원은 몇 차례 대전 방문을 통해 각 자치구 간 뜨거운 유치 총력전이 펼쳐지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동안 워낙 지지부진했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경쟁 그 자체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라며 미소를 드러냈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들이 나오기도 했다고 귀띔한 그는 무엇보다 정치 논리가 아닌 야구 팬들의 대중교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대전의 진정한 랜드마크를 만들기 위한 장기적인 시선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3년 간 15만km의 여정, 아직도 배고픈 ‘허프라’

이처럼 허구연 위원은 단지 돔구장에 대한 문제 뿐 아니라 그동안 각종 야구장 신축 및 리모델링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적극 뛰어들었다.

하지만 야구장 건립을 위한 노력이 단지 프로팀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동호인, 일반인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바쁘게 달려왔다.

실제 그는 지난 약 3년 동안 야구발전위원장을 책임지면서 거제, 의령, 보은, 정선, 안동 등 전국 각지를 돌며 15만km의 여정을 함께했던 차를 폐차시켰다. 4대강 사업에 당초 야구 시설이 없었지만 수자원공사, 국토해양부, 문화체육관광부 등에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고, 40개가 넘는 야구장을 체육시설로 포함시켰다.

또한 2000년대 중반까지 100여개에 불과했던 야구장이 400개 이상으로 늘어나는 성과의 중심에도 허 위원이 있었다. 이같은 노력을 인정받아 2017년에는 일구상 시상식에서 영예의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야구 인프라 개선에 앞장선 공을 인정받아 2017 일구대상 영예의 대상을 수상한 허구연 위원. 연합뉴스 제공
“프로야구도 중요하지만 저는 동호인들에게 야구를 할 곳이 정말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많이 뛰어다녔던 것 같아요. 축구장은 집 앞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면 야구는 한 번 시합을 하기 위해 편도 2시간씩 이동해야하는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특히 거제에서 동호인들이 5000만원을 들여 쓰레기 매립장에 야구장을 만들었는데 컨테이너 박스를 보고나서는 눈물이 날 지경이었죠. 그런 점에서 노력에 대한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는 것 같아 정말 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허 위원은 앞으로도 아마추어 선수들, 동호인들이 사용하는 구장의 숫자를 계속해서 늘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 적극 뛰어다니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제도권에서 함께 뛰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스포츠 인프라를 넓히는 일은 제가 죽을 때까지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3~4살 때부터 할 수 있는 T볼도 결국 공원이 됐든 경기장이 됐든 여건이 마련돼야 할 수 있고, 그런 시설이 갖춰져서 어릴 때부터 야구를 해야 좋은 선수들도 탄생할 수 있으니까요. 어쩌다가 인프라 이야기를 계속하다보니 ‘허프라’가 됐지만 저는 아직도 한참이나 배가 고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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