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던진 사나이’ ‘황금의 왼팔 배달부’ ‘야구 전설중의 전설’ ‘야구 레전드의 원조’…. 18년전 8월 2일 별세하신 고 장태영(張泰英, 1929~1999) 선생은 한국 야구 초창기의 신화적인 존재였다.

키 164cm의 자그마한 체격을 지닌 그가 140km에 달하는 강속구 하나만으로 고교 시절 37승 1패의 기적같은 승수와 승률(0.974)을 올린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의 18주기를 추모하며 영웅적인 야구인의 삶을 재조명해본다.

그는 경남중(당시는 6년제로 현 경남중고 1~6학년에 해당) 재학시절인 1947년부터 1949년까지 3년간 청룡기 고교야구선수권 2연패, 황금사자기 고교야구선수권 3연패를 이루며 ‘무적 경남중 시대’를 구가했다.

1947~48년엔 전국대회가 3개(청룡기, 황금사자기, 화랑기)밖에 없었는데 이들 대회에서 모두 2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장태영. 사진=조선DB

당시에는 특기자가 있을 수 없었고, 체계적인 훈련을 받을 수도 없었다. 야구부 선수가 되는 길은, 반(班)대항 야구경기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면 선배들이 이를 지켜보다 지목하면 그만이었다.

장태영은 반 대항 대회에서 잘 치고, 잘 뛰고, 잘 던지고, 실로 눈부신 활약을 벌였다. 2년 선배인 정동식, 나영일은 그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보고 “야구 천재가 나타났다”며 야구부로 전격 스카웃했다.

그런데, 장태영은 어찌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가? 경상북도 선산군에서 태어난 그는 다섯 살 때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이주했다. 해방전인 당시에는 한국 사람으로서 야구하는 이가 없었고, 일본과 지역적으로 가까운 탓에 일본인들이 부산지역에서 많이 살았는데, 이들은 근무시간후 직장야구를 즐겼다.

장태영 등 야구를 좋아한 어린 학생들은 담너머 일본인들의 야구경기를 보며 혼자서 어설프게 야구 기술을 익혔다.

장태영은 선천적으로 발이 빨랐던데다 운동 신경이 발달해 공놀이를 하면서 또래들을 압도했다.

왼손잡이인 장태영은 경남중 야구부에 들어가면서 에이스인 선배 나영일에 밀려 유격수를 맡았다. 한국야구 사상 최초의 왼손 유격수, 아니 지금까지도 아마-프로 통틀어 전무후무한 왼손 유격수가 된 것이다.

왼손잡이 유격수는 애로점이 많다. 오른손의 글러브로 공을 잡아 왼손으로 1루에 송구해야 되니 늘 몸을 뒤틀거나 역모션 동작이어서 여간 몸놀림이 빠르지 않거나 센스가 없으면 타자-주자를 아웃시키지 못한다. 그런데도 날쌘돌이 장태영은 몸놀림이 경쾌해 오른손잡이 유격수보다 훨씬 뛰어난 기량을 선보여 야구인들의 찬탄을 자아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장태영이 오른손잡이용 글러브를 이용해 수비를 했다는 사실이다.

당시에는 왼손잡이용 글러브가 없었다. 경남중고 동창회보에 실린 장태영의 회고에 따르면, “고심 끝에 연식용 오른손잡이 글러브를 구해 밤낮으로 글러브를 길들이는 정성을 들여 겨우 손가락을 끼울 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오른손잡이용 글러브로 왼손잡이가 타구를 처리했다는 것은 천재가 아니면 할 수 없으며 아마 세계적으로 희귀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그는 경남중 3년 때인 1946년 마침내 투수로 데뷔한다. 에이스이던 나영일이 부진을 거듭하자 당시 고광적 감독이 전격적으로 장태영을 투수로 전환시킨 것. 마운드에 선 장태영은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펄펄 날았다.

시속 140km의 속구는 요즘엔 웬만한 고교 투수라도 다 던진다. 하지만 70년전에는 투수들이 잘해야 시속 130km를 기록했으므로, 140km는 지금의 150km에 달하는 불같은 강속구가 아닐 수 없었다. 그가 변화구 구사없이 직구만으로 타자를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절묘한 컨트롤 덕분이다.

스트라이크존 구석구석을 찌르는 날카로운 직구에 타자들이 당해낼 재주가 없었다. 요즘 말하는 로케이션이 워낙 다양하고 정확해 번번이 타자들이 삼진이나 범타를 기록한 것. 컨트롤이 들쑥날쑥한 현 프로 투수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뛰어난 기량이다. 타자와의 싸움에는 명석한 두뇌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운다.

운동선수라도 문무(文武)를 겸비해야 된다는 신념을 가진 장태영은 연습후 집에 와서는 이를 악물고 공부를 했다. 그는 서울대 상과대학을 실력으로 당당히 합격했다. 물론 당시 서울대 상대는 지금의 서울대 상대만큼 입학하기 어렵지 않았지만, 시험을 쳐서 합격한 사실은 정말 대단한 재주와 노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가 생존했을 때 ‘공부잘하는 운동선수의 모범’으로 TV나 라디오에 여러번 소개되는 걸 봤다.

그는 입학후 당연히 서울대 야구선수로 활약했다. 신입생이던 1950년 6월 25일, 대학대회중 한국 전쟁이 터지는 혼란을 겪는데, 대학시절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육군야구단에서 한솥밥을 먹은 김정환 박현식 장태영 김양중.(왼쪽부터) 사진=조선DB

그는 투수뿐 아니라 타자로서도 이름을 날렸다. 1959년 육군 야구부시절 백호기 전국종합야구선수권대회에서 기록한 11타수 9안타(0.818)는 단일대회 최고 타율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금자탑으로 빛나고 있다. 그는 지도자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상업은행(우리은행의 전신) 야구부 감독을 10년 지냈으며 1971년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일본을 꺾고 제10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대한야구협회 전무이사와 부회장, 아시아야구연맹 기술위원장으로 행정력도 발휘했으며 프로야구 출범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장태영은 금융인으로서도 성공했다. 선수 은퇴후 은행원으로의 적응을 잘해 상업은행 지점장과 영남본부장을 역임했으며 서울투자증권 상무이사로도 오래 재직해 후배들에게 귀감이 됐다.

장태영 선생은 필자의 고교 23년 선배에 사돈어른이라는 기연(奇緣)을 갖고 있다. 1985년 봄 어느날, 처제가 결혼한다며 신랑이 장선생의 둘째 아들(장주훈)이라고 알려왔다. 그 인연으로 처제의 약혼식 때 사회를 봤는데, 스포츠서울 창간 초기 엄청 바쁜 시간임에도 사무실에서 10분 거리인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약혼식장으로 뛰어 갔다가, 프레스센터의 편집국으로 뛰어온 사실이 생생하다.

장 선생에게서 여러 가지 가르침을 받아야 했음에도 초년 기자시절이라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해 더 훌륭한 야구기자가 되지 못한 건 참으로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다.

장 선생의 경남고 5년 후배로 평생 그를 존경하며 따라 다녔던 김경희(前 경남중고 재경 동창회장) 씨는 “정말 100년에 한번 태어날까 말까한 야구 영웅이셨다. 평생 올바른 생활 자세로 운동 선수로서 지녀야 할 덕목을 몸소 실천하신 것은 후배들이 깊이 가슴속에 새겨야 한다”고 그를 추모했다. 야구 칼럼니스트/前 스포츠조선 야구大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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