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춰서 잡아야 하는데 이상하게 승부를 피한다. 그렇게 볼넷으로 또다시 주자를 내보낸다. 그러기를 반복, 이제 만루가 됐다. 피할 곳이 없다. 가운데로 던진다. 홈런 한 방으로 5-2가 5-6이 된다.
누구나 위기 상황에서 홈런은 맞을 수 있다. 지난 20일, 미국 메이저리그 다저스에서 뛰고 있는 커쇼도 한 경기에 4개의 홈런을 내줬다. 개인 한 경기 최다 피홈런이었다.
타선의 도움으로 경기는 이겼지만, 커쇼는 덕아웃에서 발길질을 하며 자신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지구 1선발'로 불리는 커쇼도 저러는데, 누군들 위기 상황이 없겠나.
하지만 여기서 진짜 '톱 클래스'와 그 이하의 선수들이 갈린다. 득점권에서 상대에게 안타를 허용하지 않는, 위기에 특히 강하고 홈런은 내줘도 흐름은 넘겨주지 않는 투수, 그게 진짜 톱이다.
그렇다면 KBO리그에서 정말로 '톱'이라 부를 수 있는 선수는 몇 명이나 될까? 우선 위기 자체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이닝당 출루허용률(WHIP)이 좋은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위기에 닥쳤을 때, 얼마나 상대를 효과적으로 제압하는지가 중요하다. 득점권 피안타율(OAVG)도 여러 기준 가운데 유용할 것 같다. 그럼 두 가지를 기준으로 10개 구단의 선발진을 살펴보자.
10개 팀 선발 가운데 이닝당 출루 허용률이 가장 낮은 선수는 바로 kt 피어밴드다. 1.02다. 공동 2위는 NC 해커와 넥센 한현희로 1.08이다. 그리고 4위가 임기영이다. 1.09다.
1.10 이하의 WHIP를 기록한 규정이닝 선발은 위의 네 명이 전부다. 이 중에서 임기영은 평균자책점이 1.92로 리그 1위이며 피어밴드는 꼴찌로 추락한 kt를 혼자 먹여 살리고 있다.해커 역시 리그 2위로 팀 선발진의 에이스로 활약 중이며 지난 21일 경기에서도 SK를 상대로 완투승을 기록한 바 있다. 세 선수 모두 리그 톱 수준의 선발이다. 그러면 득점권 피안타율을 보자.
득점권에서 피안타율이 가장 낮은 선수는 LG 차우찬이다. 74번의 상황에서 허용한 안타는 11번에 불과하다. 피안타율이 0.149다. 무엇보다 득점권에서 볼넷을 허용한 적이 단 3번에 그친다.
위기 자체를 사전에 막고 설령 위기에 몰리더라도 최소한의 실점으로 경기 흐름을 내주지 않는 선수가 바로 차우찬이다. 자연스레 이닝을 많이 소화할 수 밖에 없고 이는 불펜의 부담을 줄여준다. LG의 불펜이 리그 최강인 것은 선발진의 보이지 않은 도움이 꽤나 크다.
그 다음은 앞에서 나온 해커와 임기영이다. 피안타율 2할1푼8로 공동 2위다. 그리고 4위가 피안타율 2할2푼의 롯데 박세웅이다. 롯데를 먹여 살리고 있는 안경 에이스다. 팀 내 외인이 모두 주춤한 사이, 홀로 7승을 따내며 고군분투 중이다.
위의 두 가지 기록만 보면 KIA 임기영과 NC 해커가 리그에서 가장 위기 관리 능력이 좋은 선수라고 볼 수 있다. 두 선수의 소속팀이 현재 리그 1위와 2위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