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KBO리그가 31일을 기해 오랜 기다림을 깨고 드디어 막을 올렸다. 상대적으로 긴 시간 동안 경기가 없었던 탓일까. 2017시즌 개막전이 막 치러지니 이제야 시즌이 시작됐음이 비로소 실감이 난다.

새 시즌 개막전을 지켜보면서, 나의 옛 추억들이 떠올랐다. 나 역시 개막전 선발 등판이라는 드문 기회를 얻어낸 바 있다. 통산 3차례(2002, 2003, 2007)의 개막전 선발 등판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만 해도 나는 참 운 좋은 선수였다.

2007년 4월 6일 잠실 KIA전에 선발 등판한 박명환 코치의 현역 시절 모습. 스포츠코리아 제공
나에게는 한국시리즈 1차전 등판보다 개막전 선발 등판이 더욱 떨리고 영광스러운 무대였다. 보통 개막전은 각 구단이 가장 신뢰하는 투수를 꺼내들기 마련이다. 새 시즌을 시작하는 구단이 나를 페넌트레이스 전체를 끌고 갈 에이스로 점찍은 셈.

설레임이 가장 앞서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부담감과 두려움 역시 상당했다. 특히 개막전 은 선수들 사이에서 한 해 농사를 결정짓는 중요요소로 꼽힌다. 첫 단추를 잘 못 꿰는 것 만큼이나 기분 나쁜 것도 없다. 따라서 나는 3차례의 개막전 모두 그 어느 때보다 혼신의 힘을 다해 던졌다.

문제는 앞선 두 차례의 개막전은 모두 성적이 좋지 못했다는 점이다. 생애 첫 개막전 선발 등판이었던 2002년 잠실 KIA전에서는 패전을 2003년 대구 삼성전 역시 패전을 간신히 면했을 뿐 경기내용은 좋지 못했다.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경기는 2003년 개막전이었다. 당시에도 나와 가깝게 지냈던 (이)승엽이 형이 나를 상대로 연타석 홈런에 성공했기 때문. 이승엽은 1회말 나의 3구째 슬라이더를 때려내 좌월 투런포를 때려냈고, 2-1로 앞선 1사 1루에서도 우월 투런홈런을 기록했다.

당시 승엽이 형은 4타수 3안타 6타점을 기록하면서 삼성의 7-6 승리를 이끈 일등공신이었지만 연타석 홈런을 맞았던 나는 결코 웃을 수 없던 경기였다.

돌이켜 보면 2003시즌은 개막전부터 꼬였던 것 같다. 시즌 내내 19경기만을 등판하는데 그쳤고 5승10패에 그쳤다. 생애 첫 5점대 평균자책점(5.19)을 기록하기도 했다. 부상으로 인해 그해 8월부터 다음시즌을 위한 몸만들기에 돌입했는데, 모두가 연말의 즐거운 분위기에 취한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던 것이 기억에 선하다.

물론 당시의 아픈 기억이 이듬해 2004년의 영광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된 것 같다. 일찌감치 몸을 만든 덕분에 2004시즌 탈삼진과 평균자책점 부문 리그 1위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

그렇게 2경기 연속 개막전에서 연달아 상처를 입었던 나는 2007년 ‘2전 3기’ 끝에 개막전 승리 투수가 됐다. 벌써 10년 전 경기가 된 2007년 4월 6일 잠실 KIA전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당시 상대 투수는 떠오르는 KIA의 신성 윤석민이었다. 2005년 데뷔해 이듬해까지 불펜에서 필승조로 활약했던 윤석민은 2007시즌부터 선발로 보직을 변경했다. 해당 시즌 기존의 에이스 김진우가 부진을 겪으면서 그를 대신해 윤석민이 개막전 선발 등판의 영예를 안았다.

2007년 4월 6일 잠실 LG전에 선발 등판했던 KIA 윤석민. 스포츠코리아 제공
이 당시만 해도 윤석민이 이처럼 대형 선수로 성장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당시엔 몰랐지만 이제와 돌이켜보니 대스타를 상대로 승리투수가 된 셈이니, 더욱 의미가 있는 승리였던 것 같다.

하지만 상대가 부담스럽다고 해서, 나 역시 주춤거릴 상황은 아니었다. 2007년은 FA 계약을 맺고 정들었던 두산을 떠나 LG로 이적한 첫 해였기 때문. LG 팬들 앞에서 첫 선을 보였던 만큼, 호투를 펼쳐야 한다는 부담감이 상당했다.

게다가 LG는 당시만 하더라도 지난 2001년부터 2006년까지 개막전 6연패에 빠져있었다. 연패를 끊어내야 한다는 생각만 하며 공 하나 하나에 온 힘을 실어 던졌다.

간절함이 통했던 탓일까. 당시 나는 2회초 1사 만루의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김종국과 이용규를 각각 삼진과 외야 뜬공으로 돌려세우고 실점하지 않았다. 그렇게 6회까지 무실점 행진이 이어졌고, 7회부터 경기 마지막까지 한 점도 내주지 않은 불펜 투수들의 활약을 통해 경기는 1-0 신승으로 막을 내렸다.

당시 나는 6회까지 무려 120개의 공을 던졌다. 투구수 관리에 문제가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변화구를 좀처럼 구사하지 못했던 탓에 발생한 일이다. 접전 상황에서 매 순간 긴장하면서 몸쪽이나 바깥쪽으로 꽉찬 직구를 던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볼넷도 피안타도 많았다. 투구수가 급격하게 불어났던 것은 당연했다.

과도하게 경기에 몰입했던 탓일까. 나중에 등판을 마친 뒤 발을 확인해보니, 앞발의 살갗이 크게 벗겨져 있었다. 발이 상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공을 집중해서 던진 것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당시 경기에서 나의 승리를 도운 불펜 투수들 가운데 지금은 삼성으로 이적한 우규민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규민은 당시 마무리 투수로 세이브를 기록한 바 있다. 이는 우규민의 처음이자 마지막 개막전 세이브 기록이기도 하다.

지금은 대형 FA 계약(4년 총액 65억원)의 주인공 중 하나로 손꼽히지만 당시만 해도 우규민은 신예에 불과했다. 하지만 예전부터 그는 멘탈이 참 좋은 선수였다.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당시 경기에서도 아슬아슬한 1점차 리드에서 마무리 투수로 등판했지만 긴장하지 않고 세이브를 챙겼다.

허리 부상 이전에는 구속이 140km 중반까지 나왔고 사이드암이라는 특이한 투구폼 탓에 불펜 투수로 각광받기도 했다. 다만 앞서 설명했듯이 허리 부상으로 인해 지금은 구속이 다소 저하된 느낌을 받아 아쉬울 뿐이다.

다소 우려되는 부분은 있지만 그럼에도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 삼성으로 이적한 것은 굉장히 축하할 일이다. 이제는 제법 경험을 쌓은 데다 강약 조절은 물론 제구력까지 갖췄기에 구속저하를 만회할 수 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삼성 이적 후에도 좋은 모습을 보이길 기원한다.

지난 2007년 4월 6일 잠실 KIA전에서 박명환 코치의 개막 첫 선발승을 지켜낸 삼성의 우규민. 스포츠코리아 제공
개막전을 마친 선수들과 이를 지켜본 팬들에게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개막전 경기 결과에 과도하게 일희일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특히 10개 구단이 외국인 투수들로만 개막전을 치른 2017시즌은 더욱 그렇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외국인 선수들은 4월이 아닌 5월을 기준점으로 삼고 자신의 몸을 만들어 가는 경향이 있다. 페이스를 빠르게 끌어올리지 않으면서 최대 4경기는 경험을 쌓아가고 있는 시기로 인식하는 것. 당장의 성적만 가지고 일찌감치 선수를 재단하진 않았으면 한다.

물론 모두의 관심이 쏠려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개막전도 두꺼운 시즌이라는 책 중 고작 한 페이지에 불과하다. 실제로 지난 시즌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KIA와 넥센은 나란히 개막전에서 패했지만 나름 좋은 성적으로 시즌을 갈무리 한 바 있다. 개막전에서 패했다고 해서 슬퍼할 것도, 반대로 승리했다고 해서 크게 기뻐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시즌은 무척 길다. 선수들이 당장 앞에 보이는 나무가 아닌 숲을 보며 부상 없이 건강한 시즌을 보내길 기원한다.

박명환 스포츠한국 야구 칼럼니스트·해설위원/ 現 야구학교 코치, 2017 WBC JTBC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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