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선수로서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별명을 얻는다는 것은 영광이다. 어떻게 보면 큰 복이기도 하다. 별명도 얻지 못한 채 현역 생활을 마무리하는 선수들도 부지기수이기 때문.

박명환 스포츠한국 야구 칼럼니스트. 사진=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다수의 야구팬들에게 묻고 싶다. 야구선수 박명환하면 가장 먼저 어떤 별명이 떠오르는지. 역시 팬들은 ‘양배추’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것이다.

나는 `박명환의 야구사색'으로 이름 붙여진 칼럼을 통해,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야구선수 박명환을 대표하는 별명인 ‘양배추’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털어놓고자 한다.

대부분의 야구선수들은 여름을 싫어한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줄줄 흐르는 무더위는 선수들의 체력을 급격하게 저하시킨다. 덕아웃은 그나마 상황이 낫지만, 햇볕을 그대로 맞아야 하는 경기장 내에서는 더위를 피할 길 없어 선수들은 고역이다.

특히 마운드 위에서 장시간 서 있어야 하는 투수에게 여름은 정말 힘든 계절이다. 가끔은 책임지는 이닝이 길어지면 현기증을 느끼기도 한다. 당연히 경기력에 지장이 올 수밖에 없다.

현역 시절 갑상선 항진증 판정을 받았던 나는 특히나 더위에 취약했다. 갑상선 항진증 환자들은 물질대사가 비정상적으로 활발해지는 탓에 기본적으로 땀을 많이 흘리고 더위도 잘 탄다. 이렇다 보니 이같은 모습을 옆에서 지켜봐왔던 아내는 무척 안쓰러워했다.

그러던 차에 아내는 우연히 TV 방송에서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하게 됐다. 무더위를 효과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여러 실험들을 진행했었는데, 이 중 가장 효과가 좋은 방법이 있었다. 바로 양배추였다. 양배추를 머리에 쓰면 체감 온도가 무려 8도가 내려간다는 것이었다.

곧바로 아내는 양배추 선별작업에 나섰다. 모자에 양배추를 넣어야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지만 무작정 양배추 잎을 넣을 수는 없었기 때문.

야구 모자 크기에 알맞은 양배추 잎을 골라 넣어야 했다. 아내는 양배추를 유심히 살피며, 적당한 크기의 양배추 잎을 골라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보통 정성이 아닐 수 없었다.

세심한 아내의 선별 작업을 거쳐 9장의 양배추 잎사귀를 받아들었다. 아내는 정성스레 아이스박스에 9장의 양배추 잎사귀들을 넣어두었다. 매 이닝 새 양배추 잎을 갈아 넣으며 9이닝 완투를 바라는 아내의 마음이 담긴 9장이었다. 이때가 지난 2004년 여름이었다.

양배추의 효과는 실로 놀라웠다. 이전에는 현기증이 났을 법한 더위에도, 잘 적응할 수 있게 됐다. 이후 나는 양배추를 애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양배추의 효능이 입소문을 타 당시 팀 동료였던 김동주(은퇴)와 홍성흔(은퇴) 역시 양배추를 쓴 채로 경기에 나선 적이 있다. 물론 이들은 필자처럼 양배추를 즐겨 쓰진 않았다. 시험 삼아 몇 차례 쓴 것이 전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난 2004년과 2005년, 2시즌 연속 10승 이상(2004년 12승, 2005년 11승)의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양배추의 힘이 가장 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2005년 6월 19일 잠실 한화전에서 터졌다. 당시 나는 시즌 9승째에 도전했다. 아울러 13경기 무패 행진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런 탓에 나만의 징크스를 만들어 좋은 기록을 유지하고자 했다. 우선 머리를 자르지 않고 길렀다.

지난 2005년 6월 현역 시절 배터리를 이뤘던 박명환 코치(왼쪽)와 홍성흔(오른쪽). 박 코치의 머리가 덥수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스포츠코리아 제공
경기를 위해 집을 나서던 길에 아내로부터 한 마디 핀잔을 들었다. 덥수룩한 내 머리를 본 아내는 “모자를 푹 눌러써야 하는데, 그러다 양배추가 떨어질 것 같아”라고 말했다. 장난 섞인 아내의 농담은 현실이 됐다.

한화를 상대로 7이닝 무실점을 기록한 뒤 시즌 9승에 성공했다. 그런데 이날 경기에서 양배추를 두 차례나 떨어뜨린 것이 문제가 됐다. 머리가 길어 모자를 평소처럼 눌러 쓸 수 없었던 탓에 투구 도중 모자가 땅에 떨어졌다.

이른바 `양배추 투구'가 적발된 것은 2번째로 양배추를 떨어뜨렸을 때다. 처음에는 잎사귀가 마운드 위에 떨어졌다. 당시 내가 하얀색 양배추 잎사귀를 마운드에 떨어뜨린 모습을 지켜봤던 김경문 감독님은 당시 강흠덕 1군 트레이닝 코치님과 투수코치를 마운드에 함께 올렸다. 내가 건강상에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착각했기 때문.

잎사귀를 재빨리 주워 엉덩이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나는 이를 강 코치에게 살짝 넘겼다. 당시 양배추를 주워갔던 강 코치와 나는 현재 야구학교에서 코치로 함께 근무하고 있다. 흥미로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야구팬들이 기억하는 화제의 장면은 두 번째로 양배추를 그라운드에 떨어뜨렸을 때다. 투구와 동시에 모자가 벗겨지며 양배추도 함께 그라운드에 떨어졌다. 그러나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았다. 당시 주심은 양배추의 착용이 전혀 문제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양배추는 상당한 화제를 낳았다. 해외 매체들도 이른바 ‘양배추 사건’을 해외 토픽으로 전할 정도로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대중과 각종 매체들의 엄청난 관심 탓에 KBO까지 움직였다. 경기 이후 이틀 뒤, 규칙위원회를 열어 양배추의 이물질 규정 여부를 논의했다. 야구규칙 8조 2(b)항에는 ‘투수가 이물질을 몸에 붙이거나 가지고 있으면 즉시 퇴장시킨다’라는 조항이 있다.

논의 끝에 KBO는 향후 양배추를 쓰는 선수들을 즉시 퇴장시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나도 논란의 경기 이후 더 이상 양배추를 모자에 넣지 않았다.

당시 KBO는 “갑상선 항진증의 증상 완화 목적으로 양배추를 쓰는 것이라면 병원 진단을 받아 확인증을 제출하라”라고 제안했다. 규정상 양배추 착용은 금지였지만, 예외적으로 필자에게만 허락해 주겠다는 것. 일종의 ‘박명환 특별법’이었다.

그러나 KBO의 제안을 거절했다. 큰 노력을 들여가면서까지 양배추를 써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기 때문. 양배추와는 그렇게 이별했다.

이물질 규정문제는 일단락됐지만, 양배추에 대한 관심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당시 모든 취재진들은 나와 마주치면 양배추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세간의 관심이 너무나 부담스러워 모든 인터뷰를 한사코 거절했다.

지난 2005년 6월 19일 잠실 한화전에서 박명환 코치가 투구 도중 양배추를 떨어뜨리는 모습. 연합뉴스 제공
이런 탓에 양배추에 대한 루머는 점점 확대·재생산됐고, 매체들에게 불친절한 태도를 보였던 나 역시 비판에 시달리기도 했다. 지금도 양배추를 쓴 행위 자체는 후회하지 않지만 당시 곧바로 해명하지 않아 무성한 뒷이야기를 남긴 것은 무척 후회가 된다.

흥미롭게도 KBS 2TV의 인기프로그램이었던 ‘스펀지’를 통해, 양배추 착용이 재조명을 받았다. 일종의 생활 속 작은 팁 중 하나로 꼽히면서 제작진이 집으로 찾아왔다.

당시 ‘스펀지’의 메인 MC는 고교 선배이자 대표적인 야구광인 이휘재씨였다. 이휘재씨는 촬영 전 전화를 걸어 “제작진이 찾아와 촬영을 할 예정인데 촬영에 협조를 해줄 수 있는지 궁금하다”며 부탁해 흔쾌히 응했다.

‘스펀지’를 통해 야구 후배와도 예상치 못한 인연을 맺게 됐다. 그 주인공은 바로 두산의 외야수 민병헌. 현재는 두산과 KBO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했지만 방송이 나간 2005년만 하더라도 민병헌은 덕수정보고 3학년 선수였다.

해당 프로그램은 양배추의 효능을 직접 알아보기 위해 덕수정보고 야구부를 찾아가 실험을 진행했는데 이때 실험 참가자로 나선 선수가 바로 민병헌이었다. 민병헌은 2006년 두산의 지명을 받아 고졸신인으로 프로에 데뷔했다.

내가 지난 2006년까지 두산에서 뛰었기에, 민병헌과는 한 시즌을 함께 지냈다. 그러나 민병헌과 양배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지금까지도 없다. 신인이었던 그가 12년 차 선수인 나에게 쉽게 다가오긴 힘들었을 것이다.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흐른 만큼 언젠가는 꼭 웃으며 민병헌과 함께 ‘양배추’ 사건을 추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박명환 스포츠한국 야구 칼럼니스트·해설위원/前 NC 2군 보조코치, 現 야구학교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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