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나 장관, 대기업 오너나 CEO, 각종 단체장이나 기관장의 신년사는 허투루 하는 게 아니다. 올해 역점 사업, 추진 방향, 비전 제시를 담아 자신의 경영 철학을 치밀하고 열정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홍보 책임자가 초안을 작성하지만 처음부터 큰 그림을 그려주고 가필, 수정단계에서 새해 운영목표와 실적, 가치관을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KBO(한국야구위원회) 구본능 총재의 신년사는 낙제점이다. 올해는 ‘최순실 국정농단’의 여파로 경제사정이 굉장히 안 좋다는 전망을 경제 전문가나 연구소들은 약속이나 한듯 내놓고 있다.

대기업들은 인사와 조직개편, 예산 등 산적한 현안들을 예년처럼 연말에 하지 않고 대부분 무기 연기하고 있다. 일반인들이 느끼는 경기(景氣)하락도 불을 보듯 뻔하다. 프로야구 10개팀 운영은 거의 대기업들이 담당하고 있으니 그룹의 재채기에 야구단이 감기 몸살을 앓게 되는 건 10대 팬들도 감지할 수 있다.

그런데도 총재 신년사 어디에도 위기감을 엿볼 수 없다. “신뢰받는 KBO리그, 양적 성장에 안주하지 않겠다, 관람환경 개선, 아마야구와의 협력...” 등 해마다 빠지지 않는 의례적인 문구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지난해 신년사에서 선수들의 부정행위를 엄단하겠다고 공언했으나 더 엄청난 사건, 사고들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한마디 사과없이 단순히 ‘불미스런 일은 단호히 척결하겠다’는 구두선(口頭禪)을 되풀이했다.

구본능 KBO총재
아마야구와의 긴밀한 협력을 1년 전에 약속했지만, 대한야구협회는 지난해 각종 비리로 대한체육회의 관리단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겠다던 구총재는 KBO 수장으로서 야구협회의 비행을 수수방관한 꼴이 되고 말았다.

아마야구는 프로야구의 젖줄, 달리 표현하면 자식이므로 부모의 입장에서 비뚤어지지 않게 항상 성장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 올해는 대한야구협회가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로 거듭난 만큼 새로운 유기적 공존관계에 대한 해법을 제시해야 함에도 그에 대한 한마디 언급도 없이 해마다 늘어놓는 ‘협회와의 협력’으로 얼버무렸다.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800만 관중을 돌파한 것은 삼성라이온즈파크(전년 대비 62% 증가)와 고척돔(53% 증가) 개장의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올해는 관중이 늘어나는 특별 요인이 없다.

그런데도 단순한 숫자 놀음으로 1000만 관중에 대비한다는 ‘립 서비스’를 하고 있다. 경제 성장의 후퇴에다, 전력 강화에 대한 투자 열의를 보이지 않는 롯데, 한화, 삼성, 넥센, kt의 성적 부진 예상으로 시즌 중반부터 관중 이탈은 ‘삼척동자’가 아는데도 무지개빛 청사진만 내놓고 있다.

서울 대치동에 사는 고3생들의 소위 말하는 ‘SKY 대학’ 진학률이 왜 높을까? 고액 과외를 많이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기아처럼 거물 FA(자유계약선수)와 계약하는데 162억원(최형우 100억, 나지완 40억, 양현종은 편법으로 1년에 22억원)을 쏟아 붓는다면 성적이 급상승할 것은 뻔하다.

재정이 안좋은 독립구단 넥센과 창단 후 3년째 거의 투자를 않는 kt는 올해도 하위권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보인다. ‘부익부 빈익빈’ 상황이 심각해져 상-하위팀의 격차는 커질 수밖에 없다.

시즌 막판 ‘관중 썰물’ 현상이 일어날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사태의 심각성을 구총재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팀 연봉이 일정액을 넘어서면 세금을 부과하는 메이저리그의 사치세와 유사한 조치를 취할 연구팀을 만든다든지, 각 구단의 지혜를 모아 공존의 방안을 모색해보겠다는 정도의 비전 정도는 비췄어야 하지 않았을까?

오는 3월 고척돔에서 개최되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1라운드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주관한다. KBO는 보조적인 지원만 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구총재가 WBC의 성공적 개최에 KBO의 모든 역량을 쏟아붓겠다고 공언하는 데는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이후 벌어질 6개월간의 KBO 리그는 뒷전이란 말인가?

낙엽이 한잎, 두잎 떨어질 때 추운 겨울이 다가옴을 느끼고 방한(防寒) 태세를 갖춰야 한다. 그저 단풍 구경만 하고 있다가는 어느 날 닥친 찬바람에 바로 재채기를 하고 콧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야구 칼럼니스트/前 스포츠조선 야구大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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