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가 또 아쉽게 저뭅니다. 올해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나라안이 매우 시끄럽지만, 돌이켜보면 해마다 굵직한 사건, 사고가 사회 곳곳을 핥기고 지나갔습니다. 야구판에도 어김없이 갖가지 일들이 소용돌이쳤고요.

세밑에 가만 생각하니, 제가 야구 경기를 제대로 본 지가 어언 50년이 되었더군요. 그 반세기 동안의 야구 관람 및 취재중 목격하고 경험한 특이한 장면들을 독자 여러분들에게 들려 드릴까 합니다.

저는 야구명문인 경남중·고(부산 소재)를 나왔는데 동문 출신 유명 야구인으로는 장태영(작고 1929~1999, 4회), 박영길(14회, 전 롯데-삼성-태평양 감독), 허구연(24회, 전 청보 감독-야구 해설위원), 김용희(28회, 전 롯데-삼성-SK감독), 박철순(29회, 전 OB투수, 프로원년 22연승의 주역), 최동원(1958~2011, 31회, 전 롯데-삼성 투수, 한화 코치), 이대호(55회)가 있습니다. 이들중 한참 후배인 이대호 외에는 모두 친분이 많습니다.

장태영 선생은 저의 사돈어른인데, ‘태양을 던지는 사나이’라는 닉네임답게 한국야구의 전설적인 투수입니다. 1947~1949년 1~3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 대회 3연속 우승의 신화를 만들며 3년간 37승 1패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습니다. 1957년 백호기 종합야구선수권대회에는 지금도 깨지지 않은 단일 대회 최고 타율(11타수 9안타, 8할1푼8리)의 금자탑도 쌓았습니다.

제가 왜 1966년을 기점으로 잡는가 하면, 중학교 입학후 제대로 야구를 구경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여름방학인 7월말 8일간 화랑기 고교야구대회(이하 화랑기 대회)가 부산 구덕구장에서 열렸는데, 예선을 거친 전국 고교 강호들의 열전을 보기 위해 8일간 공부를 팽개치고 거의 전 경기를 봤습니다.

'빨간장갑의 마술사'로 불렸던 고 김동엽 MBC 청룡 감독이 경기도중 심판하게 강력하게 항의하고 있다.
당시엔 선크림이 없어 야구장 개근을 하다 보면 얼굴이 새까맣게 타기도 해 “어디 바캉스 다녀왔냐?”는 인사를 친구들로부터 받았습니다. 1966년 이후 50년간 야구 팬으로서, 혹은 야구 기자로서 지켜본 야구 세계의 특별한 장면과 경험을 연도별로 들려 드릴까 합니다.

*1968년 임신근의 눈부신 역투=임신근(1949~1991)은 경북고 2년 때인 1967년부터 시속 140km대의 강속구로 고교 야구를 평정, ‘무적 경북고’시대를 활짝 열었다. 1968년 화랑기 대회에서 그의 투구를 지켜 봤는데, 워낙 공이 빨라 변화구를 던질 필요가 없었다. 타자들은 타석에서 임신근의 무시무시하게 빠른 공을 칠 엄두는 못내고 쳐다만 보다 삼진을 당하기 일쑤였다. 포수에게서 공을 받자마자 바로 투구, 타자를 요리하던 그의 위력적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1969년 야구장의 인기스타 김동엽 심판=김동엽(1938~1997)은 1968년 조흥은행 야구팀이 해체되자 1971년 건국대 감독으로 가기 전 2년간 아마야구 심판으로 활동했다. 1969년 화랑기 대회 때는 1루심으로서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타자 주자가 아웃되면 양팔을 옆으로 제치는 요란한 제스처에 “유~아~라~웃(You're out)”이라고 운동장이 떠나갈 정도로 함성을 지르면 관중들은 재미있다고 박장대소를 하는 등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김동엽은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이름나 건국대-공군-실업야구 롯데-프로 해태 타이거즈 등 창단 감독만 네 번을 맡았다. MBC 청룡(옛 LG 트윈스) 사령탑 때는 늘 빨간 장갑을 끼어 ‘빨간 장갑의 마술사’로 불리웠고, 판정 항의 때는 모자를 거꾸로 쓰며 코믹하게 어필해 관중들의 유쾌한 웃음을 샀다.

이런 독특하고 재치있는 심판이나 감독을 이젠 전혀 볼수 없어 참으로 아쉽다. 명색이 프로야구 감독이라는 사람들이 경기 내내 찌푸리거나 긴장된, 혹은 무표정으로 일관하니 보는 팬들은 전혀 즐겁지 않다.

프로야구 초창기 삼미 슈퍼스타즈 에이스로 활약한 재일교포 장명부(오른쪽)가 경기도중 같은 재일교포로 삼성 에이스로 활약했던 김일융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삼성 라이온즈 제공
*1973년 황규봉의 희귀한 완봉승=4년 선배인 임신근과 같은 강속구로 경북고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황규봉(1953~2016)은 필자와 같은 고려대 73학번이다. 1973년 가을 대학야구 추계리그로 생각되는데, 팽팽한 투수전을 벌인 끝에 황규봉은 완봉승을 따내면서 경기 막판엔 솔로 홈런을 치며(당시는 지명타자제 없었음) 1대0 짜릿한 승리를 거뒀다.

투수가 완투를 하며 결승 홈런까지 친 건 한국 야구사상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그야말로 역사적인 장면이었다. 현재 고교-대학-프로에서 모두 지명타자제를 실시하므로, 앞으로 이런 대기록은 나올 수가 없다(지명타자를 쓰지 않는 미국 프로야구 내셔널리그에서는 투수가 홈런을 치는 사례가 가끔 나오나 결승 홈런은 매우 드뭄).

*1977년 박영길-김호중의 ‘투타 감독대결’=이 장면 또한 매우 희귀하다. 군 복무시절 정기휴가(당시는 25일간 이었음)를 나와 우연히 동대문구장의 실업야구 경기를 보게 됐는데, 그게 보기드문 명승부전이었다. 타석에는 실업팀 롯데 감독겸 선수인 박영길, 마운드에는 한국화장품 감독겸 투수인 김호중(재일동포로 한일은행 에이스, 국가대표 역임)이 맞붙었다. 야구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투타 감독대결’이었을듯 싶다. 필자 기억으로는 박영길이 범타로 물러났는데, 당사자인 박영길은 최근 통화에서 너무 오래된 일이라 전혀 기억안난다고.

*1986년 허구연의 마지막 인터뷰=5공 실세의 지원을 등에 업고 기업을 급성장시킨 청보그룹 김정우 회장은 1985년 6월 만년 하위팀 삼미 슈퍼스타즈를 인수, 청보 핀토스를 창단했다. 85년에도 최하위를 기록하자 그해 10월 34세인 야구해설위원 허구연을 감독으로 깜짝 스카우트한다.

허구연은 팀이 절대 약세인데다 야구 선배인 코치들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해 86년 시즌 개막후 꼴찌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여린 마음에 방송 인터뷰에서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감독직에서 잠시 물러나 한달 뒤 복귀했으나 또다시 성적이 곤두박질치자 8월 16일 해임당하고 만다.

그날 인천구장에서 허구연의 마지막 경기를 취재했던 필자는 혼자 운전하고 수유리 집으로 가던 그의 차에 동승, 단독 인터뷰를 하게 됐다(중-고-대학 2년 선배로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음). 자정쯤 집에 도착하는 걸 보고, “내일 아침에 보도할거니까 아무 기자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단단히 부탁을 하고 회사에 보고한 후 나 귀가했다.

하지만 허구연은 집에 들어가자마자 걸려온 일간스포츠 기자의 전화를 받고 몇마디 ‘해임 소감’을 밝혔는데, 일간스포츠는 윤전기를 대기시켰다가 서울 시내판 1면에 ‘허구연 마지막 인터뷰’를 대문짝하게 보도했다. 大특종을 할뻔하다 大낙종을 하게 된 필자는 신문기자로서의 엄청난 쓴맛을 봤다. 뜨끈뜨끈한 기사는 절대로 묵혀서는 안된다는 교훈도 얻었다.

*1986년 장명부의 도박=프로원년 삼미 슈퍼스타즈는 치욕의 18연패를 당하는 등 최하위에 그치자(15승 65패, 0.188) 일본 프로야구 중간급 투수이던 재일동포 장명부를 데려온다. 83년 1월 구단 허 형 사장은 상견례에서 “올시즌 30승을 거두면 보너스 1억원(현 시세로는 약 15억원)을 주겠다”고 말했다.

83년 팀당 100경기를 치르는 상황에서 30승을 거두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으므로 허사장은 지나가는 말로 던졌으나 정작 장명부 본인은 이를 믿고 그해 혼신의 힘으로 30승(16패 6세이브)을 기어코 달성하고 만다.

시즌후 장명부는 허사장에게 당당히 1억원을 요구했으나 구단주로부터 거금을 받아낼 수 없는 허사장으로서는 “허허, 그건 그냥 한번 해본 소리야”라고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이에 크게 실망한 장명부는 야구판의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았다. 84년 단일시즌 최다연패(15), 85년 시즌 최다패(25)를 기록하며 마침내 빙그레 이글스로 트레이드된다.

장명부는 84년부터 연봉을 거의 다 카지노 도박에 탕진한 것으로 보이는데, 필자한테 딱 걸리고 말았다. 86년 1승 18패에 그쳐 유니폼을 마침내 벗었는데, 그해 8월인가 인터뷰를 위해 그의 대전 숙소에 들어가니, 테이블에는 카지노가 있는 부산 파라다이스 호텔의 무료 숙박권 등 초청장이 있었고 그날도 서울 워커힐 호텔 카지노로 간다고 했다. 초청장은 카지노 이용 실적이 많은 고객에게만 발송하므로 장명부는 카지노의 큰 손님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또 이건 정말 필자만이 아는 야구 비화인데 1990년 가을 어느날, 프로 초창기부터 친분이 많았던 이해창(MBC-청보-삼성)을 오랜만에 만나러 서울 라마다 르네상스호텔에 가니, 좀 있다 장명부가 온다고 하질 않는가? 이유를 물어보니 이해창은 뜸을 들이다 “장명부와 내가 조폭에게서 돈을 빌렸는데, 돈을 갚지 못하자 일반인이라면 반쯤 죽었지만 야구 스타선수라고 봐주는거야. 대신 몇 달간 매일 오후 서너시되면 이 호텔에 와서 앉았다 가는 벌을 받으라 하더라”면서 씨익 웃는 게 아닌가? 정말 희한한 장면을 목도했다.

*1988년 야구관람 팬 사망=프로야구 사상 야구를 보다 사망한 사례가 딱 한번 있었는데, 1988년 5월 31일 부산 사직구장에서였다. 당시 29세이던 이성균씨는 평소 심장이 안좋았는지 열렬히 롯데를 응원한 후 쓰러져 앰블런스에 실려갔으나 몇시간만에 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당시 필자를 비롯한 현장 기자들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른채 귀가 또는 호텔숙소로 돌아갔다. 서울 본사에서는 야근 기자가 방송의 9시 뉴스를 보고 급히 숙소로 전화해 나를 찾았으나 외출한 나와 연결될 수가 없었다(휴대전화는커녕 삐삐도 없던 시절). 할 수 없이 야근 기자가 방송 상황만으로 기사를 작성해 로 사망 기사를 게재하고 말았다. 나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밤늦게 호텔로 돌아와 곤히 잤는데, 다음날 아침 일어나 내가 쓰지 않은 내 기사가 실린 신문을 보고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1988년 ‘야신의 탄생’=신생팀 태평양 돌핀스는 창단 첫해인 1988년 최하위(7위)에 그쳤는데, 시즌 초반부터 성적이 부진하자 구단에서는 시즌 후 감독 교체를 결정했다. 구단 신동관 사장은 담당기자이던 나에게 그해 8월쯤 감독 추천을 부탁했다. 나는 OB(당시) 김성근감독과 별 친분이 없었으나 평소의 엄청난 야구열정에 반해 그를 천거하게 됐다.

김감독은 1989년 취임 첫해 팀을 일약 3위로 끌어 올리는 대이변을 연출했고 이후 쌍방울 등 약팀을 강팀으로 단련시킨 데 이어 SK 시절 세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어내 ‘야신(야구의 神)’으로 추앙받았다. 나의 추천이 아니었더라도 본인의 뛰어난 능력으로 야구계에서 혁혁한 전공을 쌓았겠지만, 태평양 감독으로 간 게 큰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1992년 김영삼대통령 始球 특종=김영삼씨가 1993년 12월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그의 경남중고 후배들이 청와대 비서실에 몇 명 근무하게 됐는데, 필자의 동기생인 A는 경남 함양군수로 재직중 민정수석실 행정관으로 전보됐다.

나는 A를 부추겨 김대통령이 시구를 하도록 건의케 했고, 이 덕분인지 김대통령은 1994년 10월 18일 잠실 LG-태평양의 한국시리즈 1차전 시구를 했다. 스포츠조선 야구부 차장으로 재직했던 필자는 시구 사실을 사흘전 1면에 크게 보도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대통령 동정을 허가없이 사전 보도하는 것은 법에 위반된다(암살이나 테러 위험이 있으므로).

하지만 당시 나는 경호실에 불려가지 않았고 경호실 과장의 전화 한통만 받았다. 대통령의 고교 후배란 혜택을 받았던 것일까?(대한민국 건국후 체육기자가 대통령 동정 보도로 특종상을 받은 것은 필자가 최초. 스포츠조선 창간후 첫 1급 특종상 수상)

*1998년 이종범, 바람의 질주=1998년 스포츠조선 야구부장으로 재직중이었는데 회사의 배려로 그해 여름 일본 출장을 가게 됐다. 주니치 드래건스의 수호신으로 활약하던 선동열과 첫날 저녁 식사를 하고 다음날에는 나고야 구장에서 이종범의 경기를 지켜봤다.

이종범은 몇회인지 2루 주자로 나가 있었는데, 후속 타자가 중견수 뒤쪽의 깊숙한 플라이를 날리자 2루에서 냅다 홈까지 질주, 세이프되지 않는가? 중견수가 방심한 탓도 있었지만 워낙 재치있고 빠른 이종범의 주루를 막지 못했던 것. 다음날 일본 스포츠신문들은 일본 야구사상 처음있는 ‘벼락같은 주루’라며 대서특필을 했다.

*이밖에 1990년 LG 창단 특종을 놓친 일, 최동원과의 에피소드 등 더 재미난 숨은 이야기 들은 추후 기회있으면 밝힐까 한다(불분명하게 언급한 대회와 날짜 등에 대해 정확한 자료를 알려주시면 사례하겠습니다). 야구 칼럼니스트/前 스포츠조선 야구大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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