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국 이재현 기자] 현역시절 이처럼 우여곡절이 많은 선수가 또 있을까. 바로 최정상부터 이른바 밑바닥까지 경험한 박명환(39)이다. 현역 시절에는 웃는 날보다 울상을 짓는 날이 더 많았던 그였지만, 이제는 현역 시절의 ‘우여곡절’을 밑거름으로 코치로서의 성공을 위해 이를 가는 중이다.

지난 21일 경기도 성남시 야구학교에서 만난 박명환 코치. 사진 =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박명환 야구학교 코치는 지난 1996년부터 두산의 전신인 OB에서 프로에 데뷔했다. 우완 파이어볼러로 각광 받았던 그는 강속구와 슬라이더를 주무기 삼아 프로에 연착륙하는데 성공했다.

지난 1998년 OB에서 14승을 거둔 것을 시작으로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총 4시즌 동안 2003년을 제외하고 3시즌간 두 자릿수 승수를 챙기기도 했다. 2004년에는 평균자책점(2.50)과 탈삼진(162개) 선두를 기록하며 ‘닥터 K’로 불렸다.

특히 지난 2005년 더위를 식히고자 양배추를 모자에 넣고 투구하다 적발된 것은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어준 사건.

박명환 코치는 지난 2006년 12월 LG로 이적하며 인생 최대의 전성기를 맞기도 했다. 4년 총액 40억원의 FA 계약. 현재는 ‘FA 100억원 시대’가 열린 탓에 40억원이라는 액수가 크게 다가오지 않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리그 전체를 뒤흔들 만한 대형 계약이었다.

하지만 FA 계약 이후, 박명환 코치는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다. 과거부터 시달려왔던 어깨, 팔꿈치 등에 무리가 오면서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급기야 지난 2011년에는 연봉이 5억원에서 5000만원으로 대폭 삭감되는 굴욕도 겪어야 했다. 팬들은 이런 그를 가리켜 ‘먹튀’라는 오명을 붙였다.

끝내 2012년 LG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던 박명환. 그러나 포기란 없었다. 당시 주변 지인들(김병곤 트레이너, 최원호 현 SBS스포츠 해설위원)을 통해 묵묵히 현역 복귀를 준비한 것.

그는 “방출 직후 막막했던 것이 사실이다. 고질적인 어깨 통증과 허리 디스크 문제까지도 발생해 고생이 많았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이때 처음 접했던 코어 근육 운동(몸의 중심 근육을 단련하는 운동)을 통해 체계적이고 선진적인 재활 치료 및 훈련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불굴의 의지 끝에 박 코치는 1년 만에 마운드에 복귀했다. 물론 화려하지는 않았다. 지난 2013년 NC의 공개테스트를 통해 다시 유니폼을 입게 된 그다.

NC 입단 이후 박명환 코치는 ‘주연’ 보다는 ‘조연’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등판 기회도 많지 않았을 뿐더러, 성적 역시 과거에 비한다면 결코 좋지 않았다.

하지만 NC에서 보냈던 2시즌 동안 그가 얻은 것이 전혀 없진 않았다. 부상을 달고 살았던 자신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데 힘썼던 NC의 트레이닝 시스템을 통해 코치로서의 역량을 조금씩 쌓아나갈 수 있었던 것.

지난 21일 경기도 성남시 야구학교에서 만난 박명환 코치. 사진 =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박명환 코치는 “NC 입단 이후 몸이 많이 좋아졌다. NC는 트레이닝 파트를 철저히 분업화 해 관리를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기존의 코어 근육 운동을 더욱 세분화 하는 것은 물론 관절 가동 범위를 최대한 늘리는 유연성 운동에 중점을 둔 정연찬 트레이닝 코치의 훈련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해당 트레이닝 시스템의 덕을 많이 본 인물이다.당시 NC의 훈련 시스템을 접하고, 효험까지 봤던 나는 나름대로의 지도 철학을 정립할 수 있었다”라고 밝혔다.

두 시즌간 일종의 코치 연수 과정을 거쳤던 박명환 코치는 2015시즌 현역 은퇴 발표 직후 NC로부터 2군 투수 보조코치직을 제안 받는다. 어려운 시절 자신을 거둬줬던 친정팀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갈고 닦았던 자신만의 후진 양성 이론들을 실전에 접목시킬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

그렇게 박명환 코치는 한 시즌간 NC에서 2군 투수 보조코치로 지냈다. 비록 한 시즌간의 짧은 경험이었지만, 그는 선수들로부터 신망을 받는 코치 중 한 명이었다. 암 투병 끝에 재기를 노렸던 원종현에게 성공적으로 새 구종인 슬라이더를 장착시켰던 것.

심지어 타 팀 선수들도 그에게 조언을 구했을 정도. 올시즌 어깨 부상을 당한 한화 안영명이 대표적인 예. 안영명은 박 코치와 일면식도 없었지만 어깨 부상을 효과적으로 치료할 방법을 찾고자 수소문 끝에 다짜고짜 그에게 연락했다. 당황스러울 법도 했지만 박 코치는 후배를 위해 흔쾌히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해줬다. 재기를 꿈꾸는 선수들에게 박 코치는 일종의 희망과도 같은 존재였던 셈.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보인 박 코치는 “내가 선수들에게 큰 도움이 됐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며 “다만 후배들이 내가 겪었던 시행착오들을 똑같이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진심어린 조언을 건넸을 뿐이다”라며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비록 팀의 개편 바람과 함께 박명환 코치는 지난달 아쉽게 NC를 떠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둥지를 찾을 수 있었다. 지난해 NC 투수 인스트럭터로 박 코치와 인연을 맺었던 야구학교의 임호균 감독이 그에게 러브콜을 건넨 것. 야인이었던 그는 고민 끝에 지난달 16일 야구학교에 정식 합류했다.

지난 21일 경기도 성남시 야구학교에서 만난 박명환 코치. 사진 =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이때 의문점이 드는 부분이 있다. 비록 2군 보조코치였지만, 박명환 코치는 프로 구단을 경험한 코치다. 고교 혹은 대학야구 구단 등 엘리트 야구에 뛰어들어 충분히 재기를 노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최종 선택은 아무래도 유소년 야구 활성화에 초점이 맞춰진 야구학교였다. 왜일까.

박 코치는 “프로 선수들은 거의 완성된 선수들이다. 지도자 경험이 적은 내가 봐줄 것이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야구학교에서는 사회인 야구 선수들은 물론 유소년 선수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고, 내 경험을 전수해 줄 수 있다. 프로 선수들에 비해 조금만 다듬어줘도 성장세가 확연히 드러나는 선수들이 많은 만큼, 코치로서 보람이 훨씬 더 클 것 같다. 특히 그동안 제가 느끼고 배운 것들을 정립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야구학교에 합류한 배경을 설명했다.

여기에 선진적 야구 지도 시스템을 표방하는 야구학교의 기본 모토는 현역 시절부터 재활은 물론 체계화된 야구 훈련 시스템을 습득하길 갈망했던 그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렇다면 야구학교에서 그가 이루고자하는 궁극적인 꿈은 무엇일까. 프로 구단 코치로서의 화려한 복귀를 꿈꿀 것이라 예상했지만 의외의 답변이 박 코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가르치는 입장이 아닌 배우는 자세로 야구학교에서의 생활에 임할 것이라는 것.

“지금도 꿈에 대해 많은 고민이 있어요. 프로 구단에서 1년 코치를 해보니 현역 생활을 20년 가까이 했어도 이론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지식을 쌓는 데는 끝이 없다고 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야구학교는 지도자 공부를 하기에는 최적의 환경인 것 같아요. 최대한 오랜 기간 야구학교에 머물며, 여기서 쌓은 여러 경험들을 향후 제 인생의 도전에 밑거름으로 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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