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국 윤지원 기자] 10월, 찬바람이 부는 깊어가는 가을의 길목에서 2015 한국프로야구 포스트시즌 플레이오프가 치러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 15일 야구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2011년부터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팀이자 올해 5연패를 노리고 있는 삼성의 원정 도박 사건이 터진 것이다.

사실 프로야구에서 그동안 도박 파문은 크고 작게 일어나고 있었다. 해외로 전지훈련을 떠난 선수들이 휴식일에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파칭코장을 찾는 것을 `심심풀이 오락'으로 넘긴다하더라도 베팅금액 한도가 유명무실한 카지노를 찾는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상처럼 일어났다는 사실은 야구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심지어 비시즌 동안 해외 원정도박도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판돈이 수억 원 대에 달한데다 조직폭력배마저 개입되어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간의 관심을 더욱 키웠다. 게다가 삼성 선수들의 도박 연루설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삼성 김인 사장이 20일 오후 대구시민운동장에서 해외 원정 도박 혐의로 내사를 받는 선수에 대한 구단 입장을 발표하기 전 고개숙여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 삼성, 최초 한국시리즈 5연패를 바라보다 닥친 악재

최초의 보도는 TV조선에서 나왔다. 15일 밤 TV조선은 "삼성 간판급 선수 3명이 해외 원정도박 혐의로 검찰의 내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이에 인터넷에서는 여러 정황을 포착한 추측에 근거해 이러저러한 설이 나돌았으며, 구체적으로는 투수 포지션의 선수들이 유력하다는 설도 등장했다.

암암리에 팀내 간파투수인 A,B,C 세 명의 실명이 나돌고, 판돈의 크기와 '원정 도박 경영 시스템'의 구조가 알려지는 등 상당히 구체적인 정보들이 돌았다.

해당 선수들은 해외 사설 도박장인 소위 '정킷(junket)방'이라는 곳에서 수억원의 판돈이 오가는 도박을 일삼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킷방은 국내 조폭이 외국의 고급 카지노 리조트를 도박장소로 국내의 재력가에게 제공하고 그 수수료를 받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선수들은 비시즌에 마카오 카지노에서 조폭에게 자금을 빌려 도박을 하고, 귀국해서 빌린 돈을 갚는 형식을 취했다. 현재 경찰과 검찰은 삼성 선수들에 대한 내사와는 별개로 마카오 호텔과 리조트를 중심으로 조직 폭력단 4~5개와 연루 기업인을 조사하고 있다.

삼성은 지난 20일 저녁 대구구장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원정 도박 혐의에 연루된 선수들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 제외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시리즈 엔트리는 오는 25일 제출한다.

아직 혐의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선수들이 구단 자체 조사에서 완강히 부인했기 때문에 실명과 숫자는 자리에서 밝히지 않았으나 혐의 선수 A, B, C는 중심 투수로서 엔트리에서 이탈할 경우 삼성의 전력 손실이 얼마나 되는지 예측까지 등장할 정도다.

이 사건의 핵심 중 하나는 이때까지 드러난 도박 스캔들 중 이 정도로 '큰 판'이 드러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경찰은 "선수 A는 13억 원을 땄고, B는 10억 원 가량을 잃었다"는 구체적인 첩보를 입수해 수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 중이지만, 이 사건은 프로 선수들의 불법 도박에 대한 인식의 부재가 매우 심각한 상황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2008년 채태인의 모습. 스포츠코리아 제공
▶ 삼성, 올해가 처음이 아니다. '무더기 적발'

삼성은 도박 파문으로 지난 2008년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한 일간지에서 "서울중앙지검 마약조직범죄수사부가 프로야구 선수 10여명이 억대의 인터넷 도박을 벌인 협의(상습 도박)을 잡고 수사 중이다"는 단독보도에서 사건이 시작됐다.

검찰의 수사선상에 있는 프로선수 16명 중 13명은 삼성이었으며 나머지 선수들은 한화 2명, 롯데 1명이었다. 사건은 검찰이 삼성 채태인과 LG 오상민(삼성 2002~2007년)을 포함한 3명을 벌금 500만∼1,500만원에 약식 기소하는 것으로 마무리됐고, KBO는 5경기 출장정지, 제재금 200만원, 유소년 야구 봉사활동 48시간 징계를 따로 내렸다.

선수들이 상습적으로 한 온라인 도박이란 해외에 서버를 둔 불법 인터넷 도박 사이트 '바카라 게임'이었다. 삼성은 이듬해 채태인의 연봉을 대폭 삭감하기도 했지만, 당시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여론이 높았다.

삼성의 이런 전과를 생각해보면, 이번 도박 사건은 더더욱 질이 나쁘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 '호미로 막을 일 가래로 막는다'는 속담과도 같이 유야무야 감싸주기 식 마무리는 더 큰 부메랑으로 돌아왔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야구 대표팀은 2000 시드니 하계 올림픽 야구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스포츠코리아 제공
▶ 졌으면서 도박까지? 2000년 시드니올림픽 한국야구대표팀

더 심각한 것은 도박은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며, 합법과 불법을 넘어 프로선수가 가진 정신의 문제라는 점이다. 2000년 시드니 하계 올림픽에서 터진 도박 파문은 국민들이 프로야구 선수들에게 크게 실망하게 된 사건이기도 했다.

한국은 쿠바, 미국, 일본, 네덜란드, 이탈리아, 호주,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경기를 치르게 됐다. 당시 한국 전력은 정대현, 정수근, 송진우 김동주, 구대성, 이승엽, 임창용, 박재홍, 박경완, 손민한 등 쟁쟁한 실력자들이 포진해 대회 전부터 '드림팀'이라 불리며 많은 기대를 모았다. 상위 4개 팀에 포함돼야 메달권에 진입할 수 있는데, 한국은 예선 2차전 호주와의 경기에서 패배를 당하면서 불안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날 강팀 쿠바와의 경기를 기다리며 긴장을 놓지 않고 휴식을 취해야 할 선수들 중 일부가 그날 밤 회식을 틈타 무단이탈해 카지노에서 도박을 했다는 사실이 대서특필되자 국내 여론은 더더욱 크게 들끓었다.

어쩔 수 없는 전력 차이로 진 것도 아니고, 선발이었던 정민태가 2이닝도 채우지 못하고 강판되는 등 역전패라는 최악의 경기를 펼치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을 유흥을 즐겼다는 것은 국가대표로서 용서받기 힘든 행동이었다.

예선 전적 1승3패로 공동 6위의 한심한 성적에서 극적으로 4강 진출로 동메달을 목에 걸고 귀향해 더 큰 문제로 번지진 않았지만 선수들과 지도자들의 태도와 정신력에 대한 날선 비판이 날아들었음은 당연하다.

'프로야구 도박사(史)'를 대략적으로 살펴봐도 우리 야구계의 도박 문제가 하루 이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앞서 도박 파문을 삼성에게 닥친 '악재'라고 표현했으나 사실 이것은 언젠가 당연히 터질 썩은 고름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도박 문제에 질린 삼성 팬들은 오히려 '우승은 필요 없으니 이번 기회에 뿌리 뽑고 분위기를 일신하고 가라'고 구단에 촉구하는 지경이다. 이런 추문은 비시즌에도 다음시즌을 구상하며 열심히 몸을 만들고 훈련해 어떻게 팬들에게 더 좋은 모습을 보일까 고민하는 다른 건강한 선수들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기도 하다.

정희준 동아대 생활체육학과 교수는 한국 프로운동계에 도박이 만연한 이유로 '선수들이 제대로 된 여가 문화라는 개념 자체를 모른다'고 지적했다. 어릴 때부터 운동선수로 길러지며 합숙 생활의 통제된 환경에서 운동만 하던 선수들은 개인의 취향과 여가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결국 도박으로 빠지기 쉬운 환경이란 것이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청소년 운동선수의 교육의 문제다. 그러나 교육은 백년대업의 길. 현실적으로 당장 드러난 일에 대한 엄벌이 필요하다. 정 교수는 혐의가 밝혀지면 해당 선수들에게 구속, 영구퇴출, 시즌 아웃 등 잘못의 경중을 가려서 강하게 처벌하는 '일벌백계'를 강조했다. '도박을 하면 큰일 나는구나. 하면 안 되겠다'고 선수들이 스스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강도의 징계를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KBO와 검찰, 구단 측의 확실한 대응이 관건이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다. 한국 야구가 고름의 뿌리를 도려내는 잠깐의 아픔을 참고 깨끗한 프로야구 문화에 다시 착수하는 '발본색원'의 자세가 필요한 때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번 도박 사건은 지금부터 이미 예약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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