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국 김성태 기자] 상당히 중요한 승부였다. 상대는 SK가 자랑하는 '에이스' 김광현. 그러나 매번 침묵으로 일관했던 팀 타선이 제대로 터졌다. 바람 앞에 휘날리는 촛불처럼 사르르 꺼질 것만 같았던 KIA의 5위 사투가 다시 화르르 타올랐다. 팀 타선의 중심, 필이 있기에 가능했다.

KIA는 21일 인천SK행복드림구장에서 열린 SK와의 경기에서 10안타를 쳐낸 팀 타선의 활약에 힘입어 7-0으로 승리를 거뒀다. 마운드와 타선, 모두 완벽에 가까운 경기였다.

믿었던 '에이스' 양현종은 6이닝 무실점 호투를 펼치며 시즌 14승째를 달성했다. 상대전적에서 다소 밀렸던 김광현과의 승부가 부담스러웠지만, 리그 최고의 좌완 선발투수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증명한 경기였다.

양현종의 호투를 고스란히 승리로 이끌어준 팀 타선의 활약 역시 빛났다. 실제로 전날 KIA 타선의 활약을 기대하는 팬은 많지 않았다. 팀 타율 리그 최하위를 언급하는 것은 이제 식상하다. 20일 SK전에서 KIA 타선은 5안타 2득점이 전부였다.

말 그대로 답이 안나오는 타선이었다. 하지만 전날은 달랐다. 답 없는 타선에 홈런이라는 확실한 정답을 내놓은 선수가 있었기 때문. 바로 선발 4번 겸 1루수로 출전한 필이었다. 필은 4타수 2안타(2홈런) 2타점 2득점을 기록하며 맹타를 과시했다.

0-0으로 팽팽하게 이어지던 4회, 필은 상대 김광현의 초구를 그대로 공략해 비거리 110m짜리 좌월 솔로홈런을 쳐냈다. 필의 시즌 21호 홈런. 선취점이자 이날 KIA의 결승타로 기록된 홈런이었다. 숨막힐 정도로 균형을 유지한 흐름이 순식간에 KIA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이어 KIA 타선도 힘을 냈다. 상대 실책과 더불어 적재적소에서 안타를 쳐내며 8회까지 매 이닝, 득점에 성공했다. 그렇게 6-0으로 앞서고 있던 9회, 다시 필이 타석에 들어섰다. 그리고 교체된 박민호를 상대로 다시 초구를 공략, 비거리 125m짜리 좌월 솔로포를 쳐냈다. 필은 자신의 시즌 22호 홈런으로 팀의 7점째를 완성, 승리를 장식했다.

전날 승리로 KIA는 63승70패를 기록하며 연패에서 탈출, 5위 롯데와 6위 SK와의 승차를 0.5경기로 좁히는데 성공했다. 이제 11경기가 남은 상황이기에 막판까지 승부는 알 수 없게 됐다. 그만큼 전날 승부는 KIA에게 매우 중요했다. 말 그대로 승리의 시작과 끝을 모두 홈런으로 장식한 필의 활약이 절대적이었다.

팀 타선에서 유일하게 규정타석을 채운 타자 가운데 3할을 유지하고 있는 필이다. KIA 타선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필과 아이들'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침묵에 빠져있었다. 7월과 8월에는 각각 3할6푼, 3할4푼8리의 타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9월 들어 2할 중반의 타율을 기록하면서 페이스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특히 19일부터 시작한 SK전에서 그는 2경기동안 7타수 무안타를 기록했다. 필이 쳐내지 못하니 자연스레 팀 타선이 무기력에 빠졌고, 패배는 소리없이 찾아왔다.

자연스레 팬들 사이에서도 필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타 팀 외인타자들에 비해 OPS(장타율+출루율)가 낮다는 것이 이유 중 하나. 0.883에 그치는 OPS를 보여주다보니 1.283의 NC 테임즈나 1.029의 kt 마르테, 0.989의 삼성 나바로와 비교가 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필의 OPS는 생각보다 높지 않다. 규정 타석을 채운 외인 타자 가운데 필보다 OPS가 낮은 선수는 넥센 스나이더(0.873), SK 브라운(0.848)이 전부다. 팀 내에서도 주장 이범호(0.890)보다 낮은 수치다. 주전 1루수 자리에서 8할대의 OPS는 다소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출루율(0.361)도 낮지만 필의 OPS 수치가 낮은 것은 결국 홈런 개수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이유에서 비롯된다.

22개의 홈런을 쳐낸 필보다 홈런 개수가 적은 외인타자(규정타석)는 kt 마르테(20개) 뿐이다. 무엇보다 홈 경기장인 광주에서 쳐낸 홈런의 비율이 15개로 절반 이상이다. 타 구장에 가면 7개로 확연하게 줄어든다. 기록적인 측면에서 홈런 하나로만 본다면 아쉬움은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것을 잠재울 수 있는 다양한 장점을 가진 선수가 바로 필이다. 가장 큰 장점은 결정적인 순간에서 강하다는 점이다. 필의 득점권 타율은 3할3푼1리. 롯데 아두치(3할5푼5리)에 이어 외인타자로는 두 번째.

특히 역전주자가 루상에 있을 때, 필의 타율은 5할 이상이다. 게다가 만루에서는 절대적으로 강하다. 5타수 4안타 2홈런으로 만루시 타율은 8할이 넘는다. 팀이 이겨야 하는 적재적소의 순간에 확실하게 쳐낼 수 있는 선수가 바로 필이기 때문.

결정적인 순간에 강한 필의 이러한 성향은 KBO리그 외인타자 가운데 가장 많은 15개의 결승타로 이어진다. 필이 KIA에 기여하는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다. 말 그대로 쓸데없는 개인 스탯 쌓기의 홈런이나 타격이 아닌 팀을 위한 영양가 넘치는 타격을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현대야구에서는 스탯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OPS나 WAR(대체선수승리기여도)같은 지표는 선수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충분히 신뢰도가 있다. 그러나 기록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아니다. 통계나 기록은 결국 참고사항일 뿐이다.

19일과 20일 경기에서는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전날 SK전은 KIA의 5위 경쟁에 있어 분수령이 되는 중요한 경기였다. 다른 경기들에 비해 그 중요도가 훨씬 컸다. 그러한 상황에서 필은 자신의 몫을 해냈고, 팀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외인타자에게 있어 적응도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필은 광주에서 딸을 출산하고 백일잔치를 열어 동료 선수를 초대할만큼 적응 면에 있어서는 '갑' 수준의 선수다. 이미 KBO리그에 2년이라는 시간을 뛴 검증된 선수다. 결정적인 순간에 해결사 역할을 해주는 타자. 이전까지 KIA에서 보지 못한 외인 타자. 그가 필이다.

사진 = KIA 브렛 필. 스포츠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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