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국미디어 박대웅 기자] 수많은 팬들의 따가운 눈총과 손가락질을 받았다. 심지어 "1군에 서 더 이상은 보고 싶지 않다. 다른 팀으로 보내거나 방출시키자"는 말까지 쏟아졌다. 선수는 견뎌내기 힘든 부담감과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감독은 선수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단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믿음을 변함없이 드러냈을 뿐이다. 본인이 쓴 저서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는 제목대로 그는 움직였다.

지난 21일 한화 김성근 감독은 LG와의 3연전을 앞두고 정범모에 대한 칭찬을 두 차례나 남겼다. 최근 좋은 활약을 펼쳐주고 있는 선수에 그의 이름을 포함시켰고, 허도환을 적극 활용하지 않고 있는 이유를 언급할 때 또다시 "정범모가 잘 해주고 있잖아"라고 답했다.

공교롭게도 이날 정범모는 최악의 본 헤드 플레이를 범하며 연승을 기록 중이던 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5회말 2사 만루 위기에서 선발투수 유먼이 이진영에게 밀어내기 볼넷을 내준 가운데 정범모 홀로 이를 삼진으로 착각해 1루수 김태균에게 공을 던진 뒤 3루 덕아웃으로 유유히 발길을 옮긴 것. 결국 2루에서 3루로 이동한 주자 정성훈이 홈을 파고들면서 양 팀의 점수 차는 4점까지 벌어졌고, 승부는 여기서 LG에게로 완전히 기울었다.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기 전에도 정범모는 줄곧 팬들의 애를 태웠다. 16경기를 소화하는 동안 타율 1할5푼(40타수 6안타) 4타점 1득점에 머물렀고, 도루 저지율 역시 1할5리에 그쳐있었던 것. 폭투(15회)가 리그에서 가장 많이 나온 팀이 한화였고, 주전 마스크를 쓴 정범모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때문에 김 감독의 칭찬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리송했다. 그런데 더욱 뜻밖의 상황은 정범모의 실수가 있었던 다음날 김성근 감독은 문제의 장면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정범모에게 따로 격려의 말을 남겼는지를 한 취재진이 묻자 김 감독은 "이야기 할 것이 뭐가 있나"라고 운을 뗀 뒤 "야구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니겠나. 오늘도 당연히 출전을 시킨다"고 답했다.

그는 이어 "그런 실수를 했다고 출전을 시키지 않는다면 남아 있는 야구 선수가 있겠나. 야구를 조금만 이상하게 해도 선수들은 욕을 먹게 되어 있다"면서 정범모를 감쌌다.

김성근 감독은 실제 포수 지성준을 잠실구장으로 불러들였지만 그를 1군 엔트리에 등록시키지는 않았다. 적절한 긴장감을 정범모에게 심어주는 한편 그를 다시 한 번 선발 8번 포수로 기용하며 변함없는 신뢰를 함께 드러냈다.

그리고 이날 정범모는 김성근 감독의 기대에 일정 부분 보답했다. 경기 전부터 비장한 표정 속에 배팅 장갑을 끼고 타격 훈련에 임했던 그는 1-1로 맞선 2회초 무사 1, 2루에서 희생번트를 성공시키며 한화가 다시 앞설 수 있는 연결고리 역할을 해냈고, 4회 1사 2루에서는 4-1까지 달아나는 우익수 방면 적시타를 때려냈다. 이후 6회 1사 2, 3루에서 우익수 플라이에 그쳤고 주자 역시 불러들이지 못했지만 이미 앞선 타석에서 때려낸 적시타 한 방이 LG의 추격에 부담을 안긴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수비에서도 그는 이날 4회 공을 한 차례 빠뜨리기는 했지만 평소보다 집중력을 발휘해 수많은 원바운드 공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이날의 히어로 가운데 하나였던 박정진이 종으로 크게 떨어지는 주무기 슬라이더를 마음 놓고 구사할 수 있도록 든든한 도우미 역할을 수행했다.

경기 직후 김성근 감독은 "투수들이 제 역할을 잘 해줬다. 정범모의 리드 역시 좋았다"며 다시 한 번 정범모의 활약상에 대해 언급했다. 정범모 역시 "기회를 주신 감독님께 감사드린다"는 짧고 굵은 말과 함께 향후 꾸준한 활약으로 보답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정범모 외에도 김성근 감독은 그동안 여러 의미에서 수많은 선수들에게 기회의 장을 열어줬다. 고양 원더스 시절 프로의 꿈을 마지막으로 가슴에 품은 선수들에게 길을 제시했고, 내리막을 걸으며 팀 내 입지가 급격히 좁아진 배영수, 권혁, 송은범을 FA로 영입해 부활을 돕고 있다.

입단식 당시 송은범의 볼을 장난스럽게 꼬집으며 "잘 해보자"는 말을 남겼던 김 감독은 22일 역시 경기 도중 위기에 놓인 권혁에게 직접 다가가 "흥분하지 말고 천천히 던져라. 2점을 줘도 괜찮다"는 말과 함께 다시 한 번 선수의 볼을 어루만졌다. "너를 믿고 있다"는 강한 신뢰와 미안함, 고마움, 이 모든 감정이 그의 동작 속에 듬뿍 담겨 있었다.

육체적으로는 혹사라는 말이 충분히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힘든 처지에 놓인 선수들에게는 누구보다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는 김성근 감독이다. "강훈련을 통해서 강치료를 해주고 있지"라는 농담과 함께 껄껄 웃는 그의 모습에서 진정한 리더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사진=한화 이글스, 스포츠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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