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스크린경마장 실패로 추락

서울 네 모녀 실종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투신 자살한 이호성(41)은 해태 타이거즈를 대표하는 간판타자이자 은퇴 후에는 성공한 사업가였다.

광주 서석초-충장중-광주일고-연세대를 거친 뒤 90년 KIA 전신 해태에 입단한 이호성은 데뷔 첫해 단숨에 주전을 꿰차며 김봉연-김성한의 대를 이을 간판타자로 주목 받았다. 이호성은 90년과 91년 골든글러브를 수상했고, 91년에는 제1회 한ㆍ일 슈퍼게임 한국대표로도 선발됐다.

이호성은 삼성과 한국시리즈를 치르던 93년 10월 부친상을 당했다. 부친상에도 불구하고 이호성은 출전을 강행하는 투혼을 발휘했고, 검정색 리본을 단 해태 선수들은 초반 1승1무2패의 열세를 딛고 역전 우승을 일궜다.

지난 2001년 현역에서 은퇴한 이호성은 2002년부터 사업가로 변신했다. 광주에 자신의 이름을 딴 '호성웨딩문화원'을 차린 이호성은 1년 뒤 전남 목포에 분점까지 낼 정도로 사업수완도 뛰어났다.

선수시절 리더이자 맏형으로 후배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았던 이호성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많았다. 해태 후신 KIA 선수들과 관계자들은 결혼, 회갑연, 돌잔치 등 경조사가 있을 때 어김없이 '호성웨딩문화원'을 이용했다.

잘 나가던 이호성은 2004년 전남 순천에 스크린경마장을 차리려 했다가 낭패를 봤다. 사업실패로 큰 빚을 진 이호성은 지난 2005년 행정수도 관련 토지사기사건에 연루돼 실형까지 살았다. 이때부터 이호성은 주변과 연락을 거의 끊은 채 서울 등 수도권에서 지내온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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